제목 : [부·울·경 출향기업인 열전] 라미드그룹 문병욱 회장 |
작성자 : 김영봉(57) / 2015-04-20 |
가수 나훈아랑 무척이나 닮았다. 다부진 체격에 굵은 얼굴선, 큰 코에 곱슬머
리까지…. 체형과 얼굴형은 '영판 나훈아'. 하지만 너털 웃는 모습에선 시골 아
저씨같은 순박함이 묻어있다.지난 15일 서울 삼성동의 라마다서울호텔에서 만
난 라미드그룹 문병욱(63) 회장은 나훈아 얘기에 "사실 젊었을때 참 많이 들었
는 데, 진짜 닮았나요?"라며 웃었다.
1973년 서울서 목욕업 시작 호텔 4곳·골프장 3곳 거느려 철저한 조사가 투자
성공 비결 노 전 대통령과 부산상고 동문 특혜 루머로 검찰 수사 고초도 최근
부산 위한 사업 구상 돌입 "조만간 큰일 한번 낼 겁니다" 지난 1973년 시작한
목욕탕 사업이 이제는 호텔 4곳과 골프장 3곳 등을 거느린 1조 원 대의 '그
룹'이 됐다. 그가 손댄 부동산과 사업체마다 땅값이 오르고 실적이 개선되면
서 부동산 업계에선 '미다스의 손'으로 알려져있다. 몇 년 전 재벌닷컴이 발표
gks '한국의 400대 갑부'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가 현재 운영하는 호텔은
서울의 라마다 서울호텔과 빅토리아호텔, 인천의 라마다송도호텔, 경기 이천
의 미란다호텔이고, 골프장은 경기 양평TPC GC, 남양주CC, 경북 의성에 있
는 엠스클럽 의성CC 다. 지금이야 '회장님' 소리 듣는 그이지만 성장기는 그
야말로 춥고 배고픈 시기의 연속이었다.
경남 함안의 깡촌에서 태어나 철도 공무원 아버지 밑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어
렵게 자랐다. 부산상고(현 개성고)를 다닐 때는 하숙비가 없어 직접 밥을해먹어
가면서 다녔다. 고교시절 추억이라며 들려준 이야기 한토막. "그 때는 취직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서 상업 과목을 열심히 공부한 기억이 납니다. 서면에 학교
가 있었는데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학교 옆 돼지국밥인 줄 알았지요.
당시 축구부와 야구부가 있어서 대신동 운동장에가서 목이 터저라 응원도 많
이 했지요."
졸업후 그는 현대그룹에 경리로 취직을 하게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직
장인이었다. 그렇게 몇년을 다니다가 문득 그는 현금이 오가는 목욕탕에 관심
을 갖게 됐다. 회사 그만두고 서울 망우리에 있는 목욕탕을 인수했다. 이처럼
사업가로서의 첫 단추는 당시 자수성가한 이들과는 사뭇 다른 코스다. 당시엔
건설업이나 제조업으로 뛰어들어 성공한 이들이 많았는데 그는 서비스업에눈
을 돌린 것이다."회사 다니면서 한 일이 경리인데, 목욕탕은 일상적인 수입으
로 경비를 충당할 수 있다고 판단을 하게 됐지요." 그렇게 해서 인수한 목욕탕
은 도시확장으로 인해 장사가 잘 됐다 이후 1987년까지 늘린 목욕탕 수가 5개
가 되면서 그는 호텔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목욕탕과 호텔은 '급'이 달랐다.
땅 사고 건물 올리는데 , 그동안 번 돈으로 충분하지 싶었는데 아니었다.목욕
탕 5개를 다 팔고도 모자라 자금난을 겪었다.
당시 은행에 다니며 사업자문을 해주던 부산상고 동기생인 오도환 현 라마다
호텔 앤 리조트 대표는 "문 회장이 손대는 부동산마다 성공했는데 당시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낮엔 돈 구하러 다니고 밤엔 호텔 공사장에서 자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힘들게 지은 서울 강북의 빅토리아호텔이 '대
박'이 났다. 성공신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 뒤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1997년 터진 IMF다. 당시 호텔 사업으로 해서 모아둔 돈으
로 그는 국민주택채권과 회사채를 할인해서 샀다. 그런데 1년만에 투자금이
2배이상으로 모였다. 당시 채권을 사면 다 휴지조각이 된다는 소문이 나돌았
지만 그는 충분히 돈이 된다는 판단을 했고 그것이 적중했다. 채권을 다 팔고
곧바로 부동산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그때 이천 미란다호텔, 양평TPC골프장, 라마다 송도호텔을 차례로 인수하게
됐지요. 거의 IMF 이전 시세의 3분의 1 가격에 살 수 있었고, 사업규모를 대폭
확장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시중에서는 노무현 대통령때 무슨 자산을 늘렸다
거나 특혜를 받은 걸로 이야기하는데 노무현 씨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이미
사업을 키운 상태였습니다." 그가 부동산 투자를 하면서 큰 실패없이 급성장
할 수 있었던 데는 그만의 '철칙'이 있다. 바로 돌다리를 수 십 번 두드리는
꼼꼼함이다. 오도환 대표는 "부동산에서 인수할 목표물을 정하면 문 회장이
직접 10여 차례 가 본다. 그 다음에 해당 분야의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다시
수 십 차례 둘러보고 의견을 들은 뒤 투자여부를 결정한다"고 귀띔해주었다
시련도 없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부산상고 동문이라는 이유로
그
는 수 차례 검찰 수사를 받았다. 그런 고초를 겪으면서도 모교에 대한 애정은
더해졌다. 지난 2월까지 2년간 총동창회 회장을 지냈고, 모교에 2억 원의 장
학금까지 쾌척했다. 현재 그룹 내에도 고교 동기와 후배들이 5~6명 근무하고
있다. "사업하면서 자금난이나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많은 도움을 준 친구와
선후배들에 대한 의리죠."
문 회장은 사실 대학과 직장생활, 사업을 모두 서울과 수도권에서 하느라 부산
이나 고향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그랬다가 총 동창회장을 맡으면서 부산을
다시보게 됐다."한마디로 부산에 빠졌죠. 한 번은 비 온 뒤 성지곡에 갔는데 편
백나무향이 너무 좋았어요. 부산시내에 그런 길이 있다는 게 놀라워요. 또 그
동안 부산을 다니면서 불만이 바닷가로 아파트를 성냥곽처럼 지은 것인데 최
근 해안을 다리로 연결하는 공사가 진행 중인 것을 보면서 뿌듯합니다. 앞으로
세계적인 명물이 될 겁니다."그는 부산을 위해 할 일을 구상중이다. "제가 관광
레저업을 하고 있으니까 해안도로 쪽으로 해서 일 한 번 낼 겁니다. 기대해
주세요."
(부산일보 4월20일자 부,울,경 출향기업인 열전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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