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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노무현의 집사'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제목 :  영원한 '노무현의 집사'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작성자 : 동창회사무국() / 2019-05-22




[윤현주의 맛있는 인터뷰] 영원한 '노무현의 집사'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노 대통령은 보통 사람 살 맛 나는 세상 꿈꾼 비운의 개혁가”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은 “봉하마을에 들어와 같이 살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권유를 끝내 거절한 게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 서거 후 죄인으로 살고 있다”고 밝혔다. 강원태 선임기자 wkang@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은 “봉하마을에 들어와 같이 살자는 노무현 전 대
통령의 권유를 끝내 거절한 게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 서거 후 죄인으로 살고 있
다”고 밝혔다. 강원태 선임기자 wkang@





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10주기이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

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한 편의 시처럼 함축적인 유서를 남기고 부

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려 서거한 지 10년. 진보와 보수, 정치적 성향을 떠나 노무

현의 죽음은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많은 이들에게 ‘지못미’의 아픔을 안겼다.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지낸 최도술(71) 씨. 그는 영원한 ‘노무현의 집사’로 불

린다. 수많은 ‘노무현의 사람들’ 중에서도 노무현의 인간적인 면모를 가장 속속

들이 알고 있는 그를 만나 3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는 그가 상임이

사로 일하고 있는 그린닥터스 개성병원 추진위원회 사무실(부산 온종합병원 10

층)에서 있었다. 그는 노무현을 추억하며 자주 눈시울을 붉혔다.


폐암3기 진단 치료 받다 목뼈로 전이

항암치료 않고 지냈는데 기적처럼 나아

그린닥터스 개성 진출 도와준 게 인연

지난해부터 개성병원 추진위서 봉사 중

노 대통령과는 변호사 개업 때 알게 돼

사업 실패 후 1984년부터 사무장 맡아

노 대통령 1989년부터 대권 꿈꿔

사표 파동 후 “나라 들어 묵자” 밝혀

SK 자금 수수 사건은 검찰 수사 잘못

선배 부탁 받고 봉투만 전달했을 뿐

2008년 11월 부부 동반 골프가 마지막

봉하에 들어오란 말 사양하니 가 버려



-암 수술을 했다고 들었는데?


“2012년 11월 폐암3기 진단을 받고 방사선·항암 치료를 거친 뒤 2013년 3월 수

술을 했다. 이어 2014년 6월 목뼈로 암이 전이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

전이암에 대해서는 항암치료를 안 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그냥 지냈다. 그런데

암이 저절로 사라졌다. 누구는 기적이라 하고 누구는 이해가 안 된다고 하고 있

다.”



그는 오는 6월이면 암 전이 진단을 받은 지 5년이 된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긍정

적 마인드를 건강 호전의 가장 큰 요인으로 꼽았다.




-그린닥터스 개성병원 추진위원회는 무슨 일을 하나?


“1주일에 한 번씩 모여 회의를 한다. 대북관계가 어떻게 돼 가는지, 그린닥터스

말고 다른 병원 조직의 움직임은 있는지, 경쟁 구도가 되면 뭘 준비해야 하는지

등 정보를 교환하고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그린닥터스와 어떤 인연이 있길래?


“그린닥터스가 개성공단에 들어가 의료봉사를 한 게 2005년부터다. 당시 정근

이사장으로부터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말씀드려 개성

공단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 준 게 인연이 됐다. 지난해 6월 다시 부탁을 받고

순전히 봉사 차원에서 참여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언제인가?

“1978년이다. 노 전 대통령이 막 변호사 개업을 하고 부산상고 동기들 모임을

주선했는데, 그 자리에 내가 불청객으로 참석하게 됐다. 그 자리에서 노 전 대통

령이 구두에 술을 연거푸 부어 주며 “당신 내 모르겠나?” 고 하더라. 나는 그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나보다 1년 선배인 그는 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노무현 변호사는 그 자리에서 최 씨에게 10년도 더 지난 고교 시절 일화를 들려

줬다고 한다. 어느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1학년 최도술이 선배들을 무

시하고 대장 노릇을 하는 것을 본 2학년 노무현이 일장 연설을 했다고. 그러자

최도술은 “인마 이거 말 잘하네. 나중에 변호사나 해 먹어라”며 빈정댔다는 것.

노무현은 변호사가 되자 최도술이 뭐 하고 지내는지 많이 궁금해 하던 차에 술

집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이 만남 이후 노 변호사는 최도술의 사무실에 자주 들

렀다고 한다.


-노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은 어떻게 맡게 됐나?

“1983년 광고기획사 사업에 실패하고 노 변호사에게 사건 변론을 좀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노 변호사가 감옥 한 번 갔다 오면 인생 망친다며 자기 사

무실에 들어오라고 했다. 자존심 때문에 1년 버티다 1984년 10월 출근하게 됐

다. 1000만 원을 조건 없이 받아 급한 불을 껐다.”


노 변호사는 최 씨에게 매일 아침 1시간 일찍 출근하게 해 6달 동안 법률를 가르

쳐 주었다고 한다.


-변호사 노무현은 어떤 사람이었나?

“상담인이나 의뢰인이 오면 그렇게 자상할 수가 없었다. 이웃과 마주치면 늘 먼

저 인사하는 사람이었다. 변론서를 아주 길게 썼다. 판사가 변론서만 보고도 다

알 수 있도록 법 조문과 판례를 꼼꼼이 기록했다. 그러다 보니 승소율이 80% 이

상으로 아주 높았다. 하지만 수임료에 대한 집착은 별로 없었다.”


1991년 노무현 국회의원 시절 지구당 당원 야유회에서 기념촬영.

1991년 노무현 국회의원 시절 지구당 당원 야유회에서 기념촬영.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하게 되는데, 그때 상황을 얘기해 달
라.

“송기인 신부와 고 최성묵 목사가 YS(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얘기해 총선에 출

마하게 됐다. 그런데 당시 이호철(참여정부 청와대 민정수석) 등 운동권 패들이

적극 저지했다. 자신들을 출세의 도구로 삼았느냐는 항의였다. 그러다 노 변호

사가 원래 알려진 남구가 아니라 동구에 출마한다고 하니까 비로소 이들은 돕

겠다고 나섰다. 동구에는 전두환 정권의 실세인 허삼수가 출마 예정이었다. 이

들은 노무현 당선이 아니라 허삼수 탄핵 운동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언제부터 대권을 꿈꿨나?


“내 생각으론 1989년부터이다. 그는 1988년 국회 5공 청문회 스타로 차세대 지

도자로 급부상했다. 그런데 1989년 사표 파동이 있었지 않나. 그해 12월에 같이

술 한 잔 하다가 “어이 최도술이, 나라가 이래선 안 돼. 정치인들이 국민과 나라

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 나라를 다시 일으켜 보자. 나라 한 번 들어

묵자”고 했다. 1995년 부산시장 선거, 1996년 종로구 총선, 2000년 부산 북강서

을 총선 등에 계속 나온 것도 대권 도전의 일환이었다고 봐야지.”


최 씨는 그 전인 1987년 노 변호사가 ‘대우조선 노조 사건’으로 구속됐을 때 면

회를 가서 “나오면 우리 정치 합시다”며 처음 정치 입문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

때 노무현은 “이 더러운 정치판에 나를 끌어들인다 말이가. 가서 일이나 해라”

고 핀잔을 주었다고 회고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기 막바지인 2007년 하반기 청와대 본관에서 기념촬영. 노 전 대통령 오른쪽이 최도술 전 비서관. 사진=최도술 제공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기 막바지인 2007년 하반기 청와대 본관에서 기념촬영.
노 전 대통령 오른쪽이 최도술 전 비서관. 사진=최도술 제공


최 씨는 ‘실장’이란 직함을 달고 노무현의 선거 때마다 함께하며 조직과 자금 관

리를 맡아 했다. 2002년 대선 때도 부산지역 자금책을 맡았다가 2003년 2월 참

여정부 초대 총무비서관에 발탁됐다.


-SK 자금 수수 혐의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살았는데, 후회하나?

“나는 지금도 검찰의 수사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나는 부산상고 선배인 이영

로 씨의 부탁을 받고 SK 손길승 회장의 봉투를 받아 전달했을 뿐이다. 그 안에

CD(양도성예금증서)가 들어 있는지 몰랐다. 그 뒤 이 씨에게 돈을 받았지만 그

돈이 SK의 자금인지도 전혀 몰랐다. 내가 부당하게 증여 받았다면 세금을 내면

되지 형사 처벌 받을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최종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나?


“검찰이 1년 4개월 동안 나와 가족, 친인척들을 철저히 훑었다. 집사람은 스트

레스로 입까지 돌아갔다. 대검 중수부와 특검 수사 받으랴, 헌법재판소 탄핵심

판 증인으로 나가랴, 완전히 지쳤다. 그래서 대법원에 가서는 변호사한테 변론

을 하지 말라고 했다. 1년 6개월 빨리 살다 나가고 싶었다.”


최 씨는 검찰이 SK 비자금을 수사하다 노 대통령의 ‘대외 신인도’ 거론에 의심

을 가지고 대선자금 수사에 돌입하게 됐고, 그 유탄이 자신에게 떨어졌다고 주

장했다. 특히 자신에게 돈을 건넨 이영로 씨가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바람에

출석하지 못한 채 재판이 진행돼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지 못했다는 게 최 씨의

주장.


최 씨는 한나라당의 대선 불법자금 모금인 ‘차떼기’ 사건이 터진 것은 자신의 꾀

에 검찰이 넘어갔기 때문이라고도 말했다. 검찰이 노무현 대선 자금을 집요하

게 추궁하길래 최 씨는 “우리 쪽만 수사하는 건 불공평하다. 한나라당 쪽도 수

사하면 다 불겠다”며 수사를 유도했다고 털어놨다.

청와대 직원식당에서 노 전 대통령과 함께한 최 전 비서관.


청와대 직원식당에서 노 전 대통령과 함께한 최 전 비서관.


-노 전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본 건 언제인가?

“2008년 11월이다. 나보고 봉하마을에 들어와 같이 살자고 자꾸 권해서 한동안

연락을 안 했다. 그러자 김해에서 부부 동반 골프를 하자고 해서 만났다. 봉하에

들어오기 싫으면 일자리라도 알아봐 주겠다고 해서 괜찮다고 하니까 벌떡 일어

나 가 버렸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게 마지막이다.”


-대통령 노무현을 짧게 평가한다면?


“원칙과 정의가 물처럼 흐르는 나라, 보통 사람들이 살 맛 나는 세상을 꿈꾸었

으나 거대한 기득권의 벽에 막혀 좌절한 비운의 개혁가라고나 할까.”

-앞으로 계획은?


“특별한 건 없다. 틈만 있으면 어디 조용한 데 가서 건강을 더 회복하고 싶다.

자연에서 살고 싶은데, 집사람이 시골생활을 싫어해서….”


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봉하마을에서 함께 살자는 그 말 들었더라면…


최도술 참여정부 초대 총무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언론에 일체 모습

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노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아 고인을

그리는 마음을 세상에 전하고 싶다며 조심스럽게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뛰어난 기억력으로 노 전 대통령과의 추억을 소환해 냈다. 노 전 대통령의

장점을 얘기할 때는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열변을 토하다가 서거 순간과 그

이후 아픈 기억을 떠올릴 때는 눈시울을 붉혔다.

봉하마을에서 같이 살자는 노 전 대통령의 요청을 들어주지 못한 게 못내 후회

가 된다는 최도술. 같이 막걸리도 마시고 얘기를 들어줬으면 노 전 대통령의 극

단적 선택을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그

는 서거 이후 죄인의 심정으로 살아 왔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용서를

비는 명상을 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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