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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 넓게 살리라 (금수현 선생과 가족 편)
 제목 :  높 넓게 살리라 (금수현 선생과 가족 편)
작성자 : 김영봉(57) / 2016-02-16

 

 

 

금수현 선생 의 얼과 족적이 담긴 모교 역사관

 

금수현 선생 가족 일행 모교 역사관 참관

 

세상 천지를 둘러 보아도 개성고(부산상고)만큼 좋은 학교는 없심더 !

 

 

모교 역사관 개관식이 거행되는 2/12일 오전10시경 비가 내리는 가운데 자가용 한 대가 역사관 앞 마당에 도착하였다 이 분들은 금수현 선생의 부인 이신 전혜금(95세 소설가 김말봉의 딸. 피아니스트) 여사,세째 아들 금누리(66세 조각가. 전 국민대 교수),금노상(64세 대전 교향악단 지휘자.중앙대 교수)딸 금내리 (68세 단국대학교 첨단과학대학 화학과 교수)씨 일행 이었다 금난새(70세 뉴월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음악감독, 성남시립예술단 예술총감독,상임지휘자, 서울예술고등학교 교장), 선생은 독일 출장으로 이날 동행 못하였다.

 

이날은 모교 103회 졸업식과 겹사되어 일행은 모교 승리관에서 열리는 졸업식에 참관하여 나성린(부산진구 갑) 국회의원, 부산광역시시의회 교육위원회 이대섭 위원장과 함께 모교 역사관 건립에 공이 많은분들에게 수여되는 감사패를 백인종 총동창회장으로부터 전달받았다

 

이어 모교 노상만(56회)역사관장 의 안내로 모교 역사관을 방문 비치된 많은 자료를 둘러본 가족 일행은 금수현 선생의 코너에서 선생의 가훈인 “높넓게 살리라”와 유품들을 보며 한참동안 감회에 잠기기도하였다 또 즉석에서 역사관에 비치된 선생이 생전 사용하시든 피아노로 부산의 원로 음악인 제갈삼(92세.부산음악협회 명예회장 전 대학교수)반주에 중견성악가 장은익(김해문화의전당 공연사업팀장 65회)이 선생이 작곡한 “그네”를 부르자 전혜금 여사와 가족일행을 비롯한 모든 참관인들이 함께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였다

 

금수현 선생과 전혜금 여사가 직접 사용하신 이 피아노는 독일 브레멘 도시의 오토테인 회사에서 1958년 제작한 피아노 이며 백건우 피아니스트도 어려운 시절에 이 피아노를 활용하여 연주하였다고 하며 또 피아노 조율 전문가도 이 피아노는 공연을 하여도 될 정도로 보관상태가 우수하다고 한다 금수현 선생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건우 (71세)의 천재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키워주셨다한다 또한 현재 비치되어 있는 피아노는 선생의 가족들이 2015.12월 모교 역사관에 기증 한것이다

 

역사관 방문을 모두 마친 선생 가족 일행은 동창회에서 주관한 역사관 개관 기념 피로연에 참석 하여 백인종 총동창회장을 비롯한 50여 동문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전혜금여사는 감격에 겨워 “세상 천지를 둘러 보아도 개성고(부산상고) 만큼 좋은 학교는 없심더! ” 라 큰 소리로 외치기도 하셨다.

 

백양이 배출한 자랑스런 인물 금수현(1919~1992  24회)선생은 음악 못지않게 한글을 사랑했다. 김녕 김씨(金寧金氏) 충의공파(忠毅公派)로 해방되던 해 10월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 교감교사들 중 김 씨 성을 가진 이가 무려 9명이나 되어 성을 '금'으로 하기로 마음먹고 교직원과 학생 앞에서 금수현으로 불러줄 것을 공포한다.자신의 이름인 김수현을 금수현으로 바꾸고, 자녀 이름을 첫째 '금나라(월간 음악 발행인,1974년 29세로 작고) 로 지었으며, 이후에도 난새·노상·내리·누리 등 우리나라 최초 순 한국어 이름을 지어주었다. 경남여고 재직시절에는 'ㄱㅕoㄴㅏㅁ'이라는 한글을 풀어 쓴 마크를 창안해 학생들에게 달게 했다. 음악용어를 '다섯줄', '높은 음자리표', '이음줄', '음표', '쉼표' 등과 같이 순한글로 바꿔 여러 학교에 프린트해서 배포하고, 당시 문교부 편수국장이었든 외솔 최현배 (1894∼1970. 국어학자)선생 에게 보냈다. 1946년에는 문교부 음악용어제정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가선(加線)을 덧줄, 강약을 셈여림, 종지를 마침, 소절을 마디 등 한글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나는 새 라는' 뜻의 금난새 선생은 아버지의뜻을 받들기위해 두 아들의 이름을 ㄴ항렬 다음인 ㄷ 을 따와 첫째가 ‘이세상의 모든 것을’ 뜻하는 “금다다” 이며 막내는 ‘세상에 드문 사람 이되라’는 뜻의 ‘금드무니" 이다

 

금수현선생은 은 강서구 대저동 낙동강둑 하천부지 전금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천득은 정미업과 땅콩 농사로 부를 이루었으나 그러나 1930년 낙동강 일천식(一川式) 공사로 높은 둑을 쌓으면서 마을 전체가 둑 밖으로 쫓겨났고 또 홍수로 인해 집이 떠내려가 빈털터리가 되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대저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등생 5명이 부산제2상업학교(지금의 개성고)로 진학한다. 졸업후 어릴 때부터의 음악가로 향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신문과 우유배달원, 그리고 피아노 가정교사 등의 아르바이트 로 도쿄 음악학교 성악학과를 졸업 후 1942년 동래여학교의 음악교사로 부임하고 다음해 당시 동래교회 반주자이며 피아노를 전공한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출신의 전혜금여사와 결혼한다.

 

선생이 남여고(당시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 교감으로 근무하면서 살던 좌천동에서 대청동으로 이사 온 것은 1947년 경남도립극장 부산극장 지배인으로 발탁되면서이다. 옛 부산상고 동창인 유대건이 수소문하여 알아본 집은 대청동 산 아래 동네였다. 금수현의 대청동 집은 지금의 중구 공영주차장 아래 망양로332번길 남쪽 서라벌맨션 A·B동(대청북길33번길 3·4호)이다. 당시 일본인 부자 하야다의 별장이었든 400평 대지에 건평이 50평, 큰 정원이 있는 시멘트로 마감한 목조건물인데. 낡았지만 그랜드피아노를 들여놓고 선생은 이 집을 '산집'이라 불렀다. 두 동 사이 계단길에는 지금도 집 정원에 서 있던 수령이 오래된 개잎갈나무가 버티고 서 있어(한 그루는 베여 나간 그루터기만 있고) 그 옛날 피아노와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금수현 시절을 얘기하고 있다.

 

현재 엣 자택 위의 망양로 355번길 산복도로 윗쪽 산만디에 위치한 금수현의 음악 살롱 은 부산광역시가 가곡 '그네'의 작곡가이자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가 중 한분인 금수현 선생의 집이 영주동 산복도로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알아내어 재조명 "이에 당시 부산으로 피난을 온 수많은 음악인, 문인들에게 거처를 제공해 주고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예술적 교류를 활발하게 지원하던 선생의 뜻을 기려, 금수현 선생의 혈육이자 세계적 음악가인 금난새 지휘자의 동의를 얻어 '금수현의 음악살롱'이라는 명칭으로 건축물을 명명하게 되었다  2013년 7월 개관한 '금수현의 음악살롱 (대표 황정미)'은 지상2층 규모에 1층에는 소공연장, 2층에는 북 카페를 갖추고 있으며, 금수현선생의 가족들이 한번씩 방문하고있으며 2년전에도 전혜금여사가 가족과 함께 방문하여 많은 주민들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셨다고한다

 

금수현 선생의 가족중 장모이며 당시 부산에서 문명을 떨치고 있던 소설가 김말봉(金末峰1901~1962)선생은 부산 영주동에서 태어나 부산진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를 거쳐 1918년 서울 정신여학교(현 정신여고)를 졸업. 1927년 일본 교토(京都)의 동지사대학(東志社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29년 『중외 일보(中外日報)』 기자로 입사. 당시 사장은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로, 부산 동광동에서 운영하던 백산상회를 팔고 서울로 올라와 신문사를 인수하였다. 1935년 『동아 일보』에 「밀림」을 연재하고, 1년 뒤 『조선 일보』에 「찔레꽃」을 연재하면서 소설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954년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최초로 기독교 장로가 되었으나 1962년 페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불후의 명곡 '그네'가 탄생하는 순간은 장모인 소설가 김말봉선생이 점심 준비하는 틈새에 금수현 선생이 장모가 읊는 시를 받아 적고 악상이 떠오르는 대로 가락을 이어나갔다. 가락을 작곡하고 피아노 반주곡까지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15분여. 때마침 점심상이 들어오고 전혜금 선생이 피아노를 치면서 즉석에서 노래를 불렀다.

 

부산 대저동 사덕마을 앞 낙동강제방둑에는 부친 금수현 선생을 기리며 1992년 2월 누리 씨가 직접 디자인 설계한 노래비 '그네'가 세워져 있고 김말봉선생의 문학비는 2001년 12월 건립되어 녹산 수문가는길의 낙동 사회복지관 옆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또 서울 성북 정릉에는 선생이 1968년에 개원하여 전혜금여사와 운영한 ‘금잔디 유치원’ 있다 전헤금여사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기에서 살고게시며 토지매매로 인해 유치원은 올해 말까지 운영된다고한다

 

자랑스런 백양인 금수현선생의 족적과 그의 휼륭한 가족들을 다시한번 재조명 해보며 모교 역사관 안에 매어달려있는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한줄기의 고귀한 글을 상기해본다

 

 

 백양 마라톤 홈페이지(cafe.daum.net/bypkq) 자유게시판에

 글  관련 photo 22ea 가 올려져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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