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민족명문학교 개성고총동창회입니다.

자유게시판

칼국수 한그릇
 제목 :  칼국수 한그릇
작성자 : 김영봉(57) / 2012-11-25

 

 

 

 

 

 

 

 

 

 

 

 

 

 

 

 

이조시대 천한 기생의  신분으로  시작하여 거상(巨商)으로 이름을 떨친
한  여성이 있었다.
신분제와  남녀 차별이 엄격했든 이시절 조선 최초의
여성 CEO 김만덕(金萬德1739-1812) 이다. 
그는  출신지인 제주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알려졌던 인물 이었다. 특히 서울 장안에서는 큰화제
를 불러일으켜, 사대부를 비롯한 많은사람들이 직접 만나 보고 싶어했던
인기 있는 유명 인사였다. 형조 판서를 지낸
이가환은 시를 지어 헌정 하
였고 영의정
채제공은 <만덕전>이라는 전기까지 써서 바쳤을 정도 였다.
또한  
김만덕  사후에 제주로 유배  온 추사 김정희는  ‘은광연세(恩光衍
世)’라는 편액을 써서 만덕의 일가에 보냈다고 한다.

 

지난 2010.3,6- 6,13까지 총 30부작으로 KBS에서 드라마로 방영된 <거
상 김만덕>을 알고있는이는 그리 많지않다.
관기(官妓)였지만 23세가 되
던 해에 기적(妓籍)에서 빠져나와 객주를 차렸다. 김만덕은 자신의 객주
를 제주 최대의 무역거래소로 키웠으며, 정조 17년(1793년) 계속되는 흉
년에  제주도에 굶어죽는 사람이 늘어나자 전 재산을 털어 500섬의 곡식
을 사서 내놓았다.  또한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평생토록 헌
신 하였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으며 죽기 직전 가난한 이
들에게  남은 재산을 골고루 나누어주고 양아들에게는 살아갈 정도의 적
은 재산만  남겼다.
현재 만덕 기념사업회(대표 고두심)와  만덕상이 제정
되어 매년  그녀의 자선을 기리고 있으며 .한편 유엔이 정한  빈곤퇴치의
날인  지난 2009년 10월 17일,에는  김만덕 나눔쌀 만 섬 쌓기 행사가 서
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려 전 재산을 털어 빈민을 구제한  김만덕을 기리
기 위한 행사로, 모두 2만 2,000섬의 쌀이 모이기도하였다


이르듯 나눔은 말로하기는 쉬워도 실행하기는 어렵다.  괴테(독일 문학인
1749-  1832) 장편소설 <빌해름마이스트의 수업>에  나오는 유명한 말인  
<
눈물 젖은 빵을먹어 보지 않은 자와 인생을 논하지 말라 >라는 말같이
나눔자의  대부분이  엣전 가난과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나눔은 본능적으로 통(通)하여 나온다고 할수있다. 
이런 사회
의  귀감(龜鑑)이되는 나눔을 몸소 실천하고있는 김진락(59회)동문  역시
이와  다를바없다 . 그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고생하며 오늘의  나눔을
하기까지
그의  인생(人生)은  온통  오뚜기 인생이었다. 지난 11/23일 부
산 시청 대강당에서 개최된 <
2012년 교통선진화 장애인 시민전진 대회 ;

대회장 김진락>행사에  나와 자원봉사를  한  자녀 김보경 (미술가;25세)

양이  부산예술 고등학교  재학중 쓴  아버지 김진락  동문의  " 자랑스런  

우리 아빠 자서전 " 인  오뚜기와 나눔의 인생(人生)을  그린 <칼국수 한

그릇>이란  글을 올려 드립니다 

 

김 동문 자녀로는 미술을 전공한 장녀 보경양외 고 3 재학중인 진수
군이 있고,부인은 현재 3년전 발병한 위암이전이(
轉移)되어 말기암
으로 삼량진에서 병가중에 있다..
이르듯  가정의 큰우환(憂患)에도
불구하고 전혀 내색을 않고 참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정말 휼륭한
동문이다. 또한 매달 거제리시장 의 <시장 칼국수;863-1383> 쿠폰
100장(싯가 350,000) 구입,불우한 사람들과 독거노인(獨居老人)
들에게  나누어 주는 아름다운 나눔도 병행(竝行)하고있다.
(글쓴이는  보경양이  쓴 <칼국수한그릇> 이란  이 글을 읽다  몇번이나  절로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였다. 또한  글을 길게 올리지 않으려고 하는데...
자서전
그대로 올리니 어쩔수없네요  동문들의 깊은  이해를 ...)

 

<칼국수 한그릇>
아빠의 유년시절과 학창시절
옛날 미나리 산지로 유명했던 동부 경남 언양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
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우리 아빠 김진락.
코흘리개 어린
나이인 다섯 살 때  많은 동네 어른들이 모여 있는  앞에서 어문(한지
에 붓글씨로 쓴 옛날 소설)을 큰 소리로 또박 또박 읽어 모두를  놀라
게 하며  영특함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곱 살 때 아빠와
네 살 된 삼촌을 남겨두고 어머니가
돌아 가셨고 어머니가 돌아 가신
후 보고 싶은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며 눈물로 어
린 시절을 보내면서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줄곧 전교 1등을 독차지하였고  
6년 동안 매년
급장과 전교아동장(요즈음의 총학생회장), 전교어린이회 회장
을  하
면서 시골 마을의 영재 탄생을 예고 하였다.

 

그 당시에는  일기쓰기  숙제는  없었으나 어머니가  보고  싶은 아픈
마음을 매일매일 눈물로 얼룩진 일기장에 담아두었다.
중학교를 시골
에서 졸업하고 가난으로 고등학교 진학이 어려웠으나 부산으로 내려
와서 부전역에서 동해남부선 기차에서 빵을 파는 오야봉(두목)의 배
려로 부전역에서 구두닦이를 하면서 당시의 명문학교인 부산상고에
9;1의경쟁을 뚤고 합격하였다.
요즈음은 샐러리맨이 많아 구두를 닦
는 사람이 많지만 그 당시는 구두를
닦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며 오야
봉이 새벽에  동해남부선 기차를 타고 장사를
가고나면 아침은 구두
한 켤레를(10원) 닦아야  10원짜리 칼국수 한 그릇을 사먹을 수 있었
다. 그러나 구두 한 켤레 닦는 것이 몹시 어려워 부전역 옆의 철물상
가(현재 전자랜드상가 건너편)에  들어가서 구걸 하듯 구두 한 켤레
를  닦아주고 5원을 받아와서 부전역 앞  광장의  칼국수 파는(노점)
아주머니한테 돈이 5원 밖에
없으니 칼국수 반그릇(5원어치)만 달라
고 하면 아주머니는 10원짜리 한 그릇
보다 더 많이 담아 주어 흐르는
눈물을 뒤로하고 칼국수를 먹으면서  “나도 언젠가는 칼국수 반 그릇
이 아닌  「칼국수 한 그릇」을  시켜 먹을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야
지!” 하며 눈물의 맹세를 하였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어느 일요일 날 아빠가 엄마와 나를 데리고
부전역
앞에 가서 현재  부전역 광장의  H빔이 놓여있는 자리가 옛날
의 칼국수를  팔던
자리라고  말씀하시면서 부전역 바로 옆의 곰장어
집에서 한 잔의 술을 마시
구두닦이 하던 옛 시절의 이야기를 하시
던 아빠의  눈에서 글썽이는  눈물을 보았다. 아마 아빠의 그 눈물 속
에는 지금도 그 자리에 그 당시 아줌마가  칼국수  장사를  하고 있다
면 “아줌마「칼국수 한 그릇」주이소”라고 크게  말하고  싶었을까.,
「반 그릇」이 아닌 「한 그릇」을・・・・・・

 

구두닦이와 김밥장사(옛날에는 밤 12시 통행금지가 있어 여관투숙객
등을 상대로  길거리에서  “김-밥”하고 외쳐대는 김밥장사)를 하면서
학업을 계속 하였으며, 재학 중에는  부산상고 개교기념 교내 백일장
에서  전교 장원을 차지하면서 시 부문에 특별한 재능을 보이기도 하
다.
1971년 10월 17일  경남 충무(현재 통영) 이충무공 기념  제 479
주년 한산대첩 백일장에  전국에서 모인 1350명의 문학도 중에  아빠
는 당당히 영광스런 장원을 차지하였다.
어릴 적부터  돌아가신 어머
니에 대한 그리움의 눈물로 얼룩진 일기장에
  담아 놓은 아픈 마음들
이 살아있는 시를 쓸 수 있었고 그  살아있는 ‘시’가  심사위원장 이었
던  청마 ‘유치환’ 시인에 의해 높이 평가 되었다고 한다.
「이순신 장
군」, 「어머니」 이순신 장군을 우리 후손의 어머니로  표출한 우리
아빠의 ‘시’
...

 

▶아빠의 사회생활.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당시 재계  4~5위의 국제상사 그룹의 입사 시
험에서 고졸 1위로 입사하여 기획감사실에 근무하면서  첫 사회생활
이  시작되었고  주식회사  선경 총무계장으로 근무하던 1977년 고졸
출신으로서  “할수 있다고  생각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I
can I will」의 캐치프레이저를 제안하여 선경그룹 전 회사에 「I can I
will」의 플라스틱 스티커를 제작하여 책상위에 붙였다. 그 당시 아빠
가 제안한 「I can I will」 은 선경그룹 전체의 유명한 캐치프레이저가
되었고 그 이후 「주식회사 아이캔」이라는  계열  회사가  설립되어
현재에도 선경그룹  계열회사로 있으며  아빠가 제안하여 제정된 「I
can I will」이 얼마나 유명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으며 돋보이는 아빠
의 창의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명문대 출신이 즐비한 엘리트들
을 제치고 고졸 출신으로서 그룹전체의 
떠오르는 별이 되었다.

  
1978년 어느 봄날 아침 몇 년 전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얼
마  전에는  교통사고를 당하여 한쪽 다리를 절단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부산공장
여종업원의 초등학교 1학년 여동생이 학교에 가
다가  트럭에 치여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을 받은  아빠는 부산대
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한쪽 다리를 힘겹게 목발에  의지하여 허
탈한 모습으로  울고 있는  어머니와  팔을 뒷짐 지고 멍하니 서 있는
학교 교장과  관계자들 앞에 응급실 바닥에 피투성이가 된 아이의 아
픈 비명의
절규가 있었고  그때까지  수술 보증인이 없어 어린생명이
죽어 가는데도 병원
의  의술도 그의 어머니도 학교 측도 모두가 무성
의한 그 모습에 허탈하고 원망스러운 우리 아빠의 분노가 있었다.

빠가 병원에 보증을 서고 양복을  벗어던지고  흰 와이셔츠 차림으로
오른
쪽  팔과 가슴위로 트럭바퀴가 스쳐간 어린아이의 “아저씨, 살려
주세요.”라는 
절규  앞에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안고 X-Ray 사진을
찍으면서 와이셔츠를
붉게 물들이고 아이가 수술실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  회사로 돌아가  와이셔츠를 갈아입는 순간 총무과 여사원
으로부터  “대학병원 에서 수술도중 아이가 사망했다는 전화가 왔습
니다.” 라는 전화 연락을 받고 텅 빈창 너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는
아빠의  가슴속에 조금전 “아저씨, 살려주세요.”라던 어린 아이의 비
명의 절규가 가슴속에 메아리 쳐왔다.


절규의 피투성이  얼마전 모습이 머릿속에 사라지지 않는 아픈 가슴
을 안고  대학병원 영안실
에 뛰어가서 담요 한 장 으로 덮어 놓은 채
방치된 아무도 없는 아이의 주검을 보고 회사로 돌아와 광목을 준비
하여 소주를 두병이나 마시고 밤늦게 불 끄진 대학병원
영안실(당시
7시 이후는 불이 꺼짐)로 가서
광목으로 아이를 감싸 주며 하늘나라
의 천사가 되어 아픔과
절규가 없는 아름다운 천상으로 영원하길 기
원하였다.
아이의 장례와 적정한 합의까지 해결해 주고 차가운 겨울
이 지나 한해가 바뀐 1979년 2월 19일  국민학교  졸업식에 느닷없이
우리 아빠가 초대되어
문교부장관의 감사패를 받았다 (당시 선경 사
보에 수상장면 사진과 기사수록)
는 우리 아빠의 훈훈한 정이 넘치는 
인간미를 엿볼 수 있었다.

  
대기업에서 고졸 출신  최연소 과장 진급을 하면서  29살에는 종업원
150명을 거느린  업계 최연소 와이셔츠 공장 백양섬유공업사 사장이
되었다.
호사다마 랄까!  아르헨티나에 와이셔츠를 수출하고 나서 바
이어에게 사기
를  당하여 그동안 열심히 노력해 쌓았던 모든 것이 하
루아침에 날아가 버리고 1억3천만원(요즘 13억정도)이 넘는 빚을 지
게 되었다.
 
당시 가지고 있던 전 재산(집3채등)을  모두 팔아서 종업
원 월급을  다 지불하고 난후 전 종업원을 모아 놓고 마이크로 “금번
여러분이 일주일이나 밤샘을 하여 델리바리(선적일자)를  맞추어 수
출한 order가 부도를 맞아 회사가 문을 닫는다.”고 하자 공장안은 전
종업원의 
울음바다가 되었고 요즈음에도 한번씩 “다른 회사 사장들
은  종업
원 월급을 주지 않고 ,도망가던  시절인데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팔아  종업원 월급을 다 준데 대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한
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당시 부산상고를 졸업한 동기중 부모
유산을 받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제일 선두 주자로 달리던 아빠는 하
루아침에 모든 것이 무너진 좌절감에 자살을 결심하여 ,공장4층에서
투신하여 죽음을 면하였으나 양쪽다리가  다 부러지는 중상으로 1년
간의 병원 생활을 하였고,
지금도 왼쪽  다리가  불편하여 걸음을  잘
못 걷는 장애인이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 자랑스러운 우리아빠

그 이후 재활의 의지로 목발을 짚고 회사에 취업하여 금융기관(보험
회사) 기업부문의  기관장으로 근무하면서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항상 주인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회사에서 인정을 받아
일본 해외연수, 미국  해외연수는 물론, 부와 명예를 함께 얻을수 있
었다.
 
내가 일곱살 때인 1994년 아빠의 미국 해외연수 때 나는 꿈에
도 그리고 책에서만 보던 꿈의 궁전 디즈니랜드, 샌프란시스코의 금
문교,  라스베가스의  거대한  카지노, LA의 영화촬영 현장과 헐리우
드, 경비행기를 타고 올라가 본
아름다운 정경의 그랜드캐년,그리고
동부의 하버드대학으로 불리는
샌드포드대학・・・.아빠와 함께한 미
국 여행이 “자랑스런 나의 자라온 모습”의 앨범에 사진 속  추억으로
가득하다.
15년간  열심히 근무하면서 13억이란  거대한  빚을 모두 갚고

부와  명예를 안고, 1995년 3월 「주식회사 보 경」을  설립하여 법원에

등기하고  현재는 동종업계 부산경남의 선두 주자로 우뚝 선 우리 아빠의

오뚝이 같은 인생에 찬사를 보낸다.

  

자랑스러운  우리 아빠의 인생관!!! 아빠의 친구들, 후배들에게 소주잔을
기울이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자주 이야기 하는・・・・・・.

1. 긍정적인 사고방식.

2. 적극적인 사고방식.

3.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

4. 미래지향적인 사고방식.

5. “하면 된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성실을 바탕으로 모든 일에 최선
을 다한
다.


매화는 겨울에 아주 혹독한 추위를  이겨  내어야만  봄에  아름다운 향기
(香氣)를 발한다
“매 경 한 고 발 청 향(梅 經 寒 苦 發 靑 香)”  의
우리 집 
가 훈 (家 訓 )의  을 “고 진 감 래 ” 가  담긴<자랑스운 우리 
아빠>의  지나온  발자취에서 이제는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우리 아빠.

희망찬 내일을 향한 힘찬 발전을 기원하며


자랑스러운 우리 아빠 파이팅!!!

 

<행사 당일 시청뒤 광장에서 촬영한 석장의 낙엽과 애기동백은

꽃보다 더 고운 선행(善行)에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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