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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태선생 친일논란에 대하여
 제목 :  김지태선생 친일논란에 대하여
작성자 : 김수철(66) / 2012-11-15

 

최근 김지태 선생을 일부 몰지각한 분들이 ‘친일’과 ‘부정축재자’로 매도하였습니다.


김지태 선생(14회)께서는 25년간이나 모교동창회장을 맡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물심양면으로 모교와 동창회에 기여하신 분입니다. 단지 그런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업가, 정치가, 언론인, 사회사업가로서 우리 현대사에 여러 지면을 차지할 정도로 큰 획을 그으신 분입니다. 또한 그런 분이기에 잘못한 부분은 잘못한 대로 냉철히 평가하고, 잘한 부분은 후세에 널리 전승시키고 발전을 시켜야 하는 게 역사가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5·16 군사정권의 18년간 철권통치와 연이은 12.12 군부쿠데타로 인해 선생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정수장학회 관련하여 일부만 부각되었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물며 일부 세력을 등에 업은 몰지각한 분들이 매도하고 있으니 해방 이후 진정한 친일청산을 못한 우리 역사의 한계라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제대로 인지하고 있어야 무지한 주위 분들에게 제대로 설명이라도 하지 않을까요?


이에 대해서 한홍구 박사의 최근 저서 <장물바구니-정수장학회의 진실> 본문에 나온 글이 가장 사실에 가까운 내용이라 발췌하여 옮깁니다. 우리 동문들께서는 제대로 인지하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 ‘친일’ 부문 (본문 36p)


1.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면서 김지태에 대해서는 자료를 수집했으나 그의 친일행각을 증명해 주는 자료를 찾지는 못했다


2. 홍순권 교수 역시 ‘일제시기 김지태를 친일파로 볼 만한 어떤 자료도 찾아내지 못했다.’ (51p)

- 홍순권 교수(동아대 사학과)는 방대한 기초자료를 정리하여 <일제시기 재부산일본인사회 사회단체 조사보고 2005>, <일제시기 재부산일본인사회 주요인물 조사보고 2006> 등의 자료집을 출간했으며, <부산의 도시 형성과 일본인들 2008>, <일제강점하 부산의 지역개발과 도시문화 2009>, <근대도시와 지방권력 한말·일제하 부산의 도시 발전과 지방세력의 형성 2010> 등의 편저자로 일제시기 부산지역사의 권위자이다.


*** ‘부정축재자’ 부문 (본문 52~57p)


1. 부정축재자 문제가 처음 불거진 것은 4월혁명 직후의 일이다. (중략) 김지태는 ‘대재벌 이기는 하나, 자유당을 이용하지 않고, 양심적 기업가로서 시종하여 여야를 막론하고 높이 평가받고 있다’(<인물계>1958년 5월호, 26p)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정치적 배경을 이용하여 자신의 치부를 꾀하는 재주도 부리지 않고 묵묵히 의원생활’(<인물계>1958년 1월호, 29p)을 했던 것이다.

그는 1951년의 조방 낙면 사건으로 이승만 정권의 박해를 받았고, 사사오입개헌에 반대하다가 자유당에서 제명을 당했고...


2. 한강 이남에서 제일가는 부자 소리를 듣던 김지태는 정부통령 선거가 있을 때마다 정치자금을 내라는 압력을 받았다. 김지태에게 가해진 압력은 단순한 압력이 아니었다.

- 1956년 정부통령 선거 1년 전인 1955년에는 탈세 혐의로 계열사 임직원들이 구속되었고,

- 1960년 정부통령 선거 1년 전인 1959년에도 계열사 임직원들이 거액 탈세 혐의로 구속되는 곤욕을 치렀다.

   → 1959년에 치안국은 조선견직과 한국생사의 사무실을 수색하고 경리장부를 입수하면서 ‘지금까지 경찰에서 취급한 조세범처벌법(세금포탈) 위반사건 중 가장 큰 사건’이라고 강조했다.(조선일보. 1959년 8월 17일)

   → 검찰은 회사 간부 8명을 구속하고 이들로부터 ‘물품세, 영업세, 법인세 등 2억5백9만환을 탈세’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조선일보. 1959년 8월 22일, 9월 1일)

   → 이 사건 역시 요란하게 시작되었지만 결과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중략)


3. (관련부분만 간단히 요약) 5·16 군사반란 직후 군사정권은 민심의 지지를 얻기 위해 부정축재자 26명을 구속... 부정축재 액수는 약 4백억이었는데, 그 중 100억 가량이 이병철의 것이었다...이의 제기로 일부는 증액, 감액되어 대부분 완납하였다.


4. 김지태는 5·16 군사반란 직후 이병철, 정재호, 이정림, 설경동, 이양구 등 재벌과 함께 부정축재자로 구속되었다가 (중략) 부정축재 환수금을 완납한 재벌 중 다시 붙잡혀가 개인재산을 강탈당한 사람은 김지태 밖에 없다.


5. 저자 한홍구 박사는 ‘박정희, 언론사를 탐하다(80p)’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유지해 나가는데 언론장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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