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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상 바보 (故)강금원 ...
 제목 :  아 ! 상 바보 (故)강금원 ...
작성자 : 김영봉(57) / 2012-09-01

<바보>라는  말이 일반인들 에게 인간적인 정감(情感)으로  불리우기 시작
하여  유행된것은  <바보 노무현> 이라는  명칭이다. <바보 노무현> '이라
는 별명은  당시 삼성에서  근무하던 유증희씨가 지은  별명으로써. 지역주
의  정치 타파를  위해 당선이  안될줄 알면서도 과감히 3번의  낙선을 겪는
노무현을 가리킨 말이다. 
불의에  굴  하지 않고, 자본에 타협하지  않으며
언론  권력등  에도  과감히  맞서는 '바보'  같은 정치인을 말 한것  이었다
 
유씨는   2000년  3월 22일  유니텔 플라자에 <바보 노무현'> 이라는  제목
으로  글을  올렸고.
2000년 4월 에  노무현  전  대통령  홈 페이지에  인용
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바보 노무현>이  자리잡게  되었다.
 글 에서 주목
할만한 내용은  
수도권  또는  전라도를  택해  국회의원이나  지방  단체장
선거에 임했더라면 남들이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좋은 자리를 몇 번 했을
텐데 굳이 떨어질 것이 확실한 부산에서 내리 3번이나 더 떨어지는 초라한
바보의 길만 걸어가고 있었다"고 노 전 대통령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
유씨는 "그의 얼굴은 주름살만 더욱 깊어가고, 현역 의원이 아닌 정치인 의
모습은 더욱 초라한 바보일뿐 이었다"며   "전 국민이  우직한 바보가  되어
우리 대한민국에서 거짓말 하지않고 정직하며 소신과 지조를  지키고 야합
하지 않는 '바보 대통령'이 탄생되는 그날을 기대해 보고싶다"고  강조하였
고."이제는 노무현 바보! 부산시민  바보!  그리고, 나도 그  바보의  대열에
끼이고 싶다"고 덧붙쳤다.
 
2000년  H 당의 텃밭인 부산에  당초 가능성이없으면서도 지역주위 타파
를 내세우며,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 했던 노무현...  부산  민심을  탓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유명한 낙선의  변을 남긴다  “농부는 밭
을  탓하지 않습니다"  이때 부터  노무현은 <바보 노무현>‘으로  불리며
당선자 보다  더  유명한  화제의 낙선자가  됐다. 특히 그가 남긴 낙선의
변은 끊임없이 인구에 회자됐다.  전국적으로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
안해)‘ 열풍이 불었다. 3당 합당을 거부한 뒤 끊임없이  ’부산의  문‘을 두
드려왔던 노무현의 진정성은  유권자들을 각성시켰다. 낙선이후  노무현
의 공식 홈페이지 에는  울분에  찬 격려의 글들이 쇄도했다. <바보 노무
현>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2000년 6월  대전에 모였다.  이들은  노사모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창립대회를 열었다.  노사모는 우리
나라 최초의 정치적 팬 클럽이다.  노사모는  20002년  대선에서 노풍의
진원지로 노무현 대통령 당선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올림픽 금메달 열기가  한창인  지난  8/2일 <바보 노무현>을 사랑했든
수많은  사람들중의  하나이며,  의리의  사나이라는 <상 바보>  강금원
(60세) 회장이 뇌종양  악화로 서울  아산 병원에서  운명하였다. 
고(故)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은 전북 부안 출신으로 전주공고,한양대 섬유공학
과를  졸업했고, 1975년 서울에서  설립한 창신섬유를 1980년 부산으로
옮겨 자수성가했다.
호남 출신으로 부산에서  사업을 했던 각종  편견에
시달려왔던 강금원은 이른바 DJ 당에서 부산에 도전하는 노무현을 적극
적으로 후원했다. 노무현이 98년 종로 보궐선거에 출마했을때는 적잖은
후원금을  보탰고 2000년16대 총선 당시에도 지지를 표명했다.또
강 회
장은 '노무현의 막역한 사람'이라 불릴만큼 노 전 대통령과 가깝게 지냈
다. 그가 노 전 대통령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95년 노 전 대통령이
부산시장 출마했다가 낙마한직후.2000년 총선때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
한  노 전 대통령을 찾아가 지지 의사를 밝혔다한다.


그는 평소 "부산 사람인  호남 민주당에 남아서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다
떨어지고,  떨어지던  노무현 의원 에게  마음의  빚을 지었다"고  말하곤
했다.
강 회장은 부산에서 성공한 사업가라는 점에서 경상도에 빚이 있었
다고 한다. 그는 "나는 젊었을 때부터 호남사람으로서  부산에 건너와 사
업을 했다"며 "늘 나는 호남에대한 끝없는 편견과  선입견에 시달려야 했
다"고 말했다.  그는  "호남 놈이 얼마나  신용있고 의리 있는지 보여주고
싶다"며 "부산 사람 노무현 대통령이 보여줬던 호남에 대한  의리가 있었
다면 나 또한 역시 호남사람으로서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을 끊임없이 후원했다. 2003년 6월에는 노 전  대통령의 후원회장
이던 이기명씨 소유의  용인 땅을 노 전 대통령 측의  요청으로 19억원에
매입했다.  노 전대통령이 실소유주였던 장수천 빚 30억원을 갚아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참여 정부 동안  어떠한  이권이나  특혜를 전혀 받지
않은 의로운 분이였다.
창신섬유는 정전기없는 담요를 주 생산하는  업체
로 사하구 신평동에 2개 공장이 소재하며,  매출312억.직원수135명,일본,
미국,유럽에 주로수출 하고있다.또한  충북 충주에 시그너스 cc 를  보유
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한 이후에는 김해  봉하마을에 내려가  노 전 대통령
의 곁을 지켰다. 당시  그는 뇌종양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노무현과의
인연은 강금원을 형극의 길로 이끌었다.  2003년 불법대선자금 사건으로
구속 기소됐고,  2006년에도  불법 대선자금 보관과  법인세 포탈 혐의로
구속됐다. 또 2009년  5월에는  회사 공금 305억원을 개인적으로 썼다는
혐의로 2009년 구속기소 됐다가.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 건강상 이유로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악화된 병세는 완화되지  않았다. 지난 5월 노  대
통령  서거 3주기 행사에도  불참했던 강 회장은 2일오후 9시께 끝내  눈
을 감았다.
노 전 대통령도  생전에  강금원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2009년  4월 홈 페이지에  글을 올려  “강 회장은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은 것이다. 미안한  마음  이루  말할수가  없다”며  면목 없는
사람 이라고  본인을 낮췄다. 특히 “강회장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대통령이 아니라 파산자가 되었을 것”이라며 “강 회장은 아직도 그 후유
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단 한 건의
이권도  청탁한 일이 없다” 고 하였다.

또 언론에 보도된 안희정 C 지사가 올린 의리의 사나이  강금원에  대한  
추모글을  보노라면  눈 시울이  더욱  뜨거워진다.
 “아무런 이득도 없이
지역주의 극복, 원칙과 상식의 세상을  향한 신념이 현실에서는 늘 낙선
과 시련이라는 대가로 돌아왔기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을 <바보 노무현>
이라 불렀다”며 “같은 논리로 ’<바보 강금원‘>이라 부르고 싶다”고 말했
다. 부산사람이 호남 민주당에 남아서 김대중 깃발 들고 지역주의 타파
를 외치다 떨어지고  떨어지던 그 노무현 의원에게 마음의 빚을 지었다
말씀 하시던 강 회장 이셨습니다.
특히 그는 강 회장이  “나는 젊었을 때
부터 호남사람으로서 부산에 건너와 사업했다.부산이 나의 제2의 고향
인 셈이다. 하지만 나는 호남에 대한 끝없는 편견과 선입견에 시달려야
했다”며 “하지만 나는 보여줄 것이다. 호남 놈이 얼마나 신용 있고 의리
있는지. 부산 사람 노무현 대통령이 보여줬던 호남에 대한 의리가 있었
다면 나 또한 역시 호남 사람으로서 보여주고 싶다”라고 말했던 기억을
회상했다.
이어 안 지사는 “세상에 대통령과의 관계가 알려진 만큼 더욱
엄격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여론 때문에 (강 회장은) 회사도 줄이고 줄
였고 해마다 정기 세무조사도 다 받았다”며 “아무런 특혜도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한 그였지만 모든 권력을 다 내려놓고 힘도 배경도 없는 전임 대
통령을 하루가 멀다고 찾아가 함께 해주셨다” 고 탄식했다.   
아울러  안
지사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것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고  생각한
다”며 <사람의 의리>와 <바른 도리>가 그 <사회의 상식>이 되고 국가
의 <법과 제도>가 되는 세상일 것”이라고 전했다. 
 
2009년 5/24일 상가(喪家)본부에  있든 글쓴이는  당시  교도소에 수감
되었든 고인( 故人 )이 잠시 풀려  당일  노 대통령  상가인  봉하마을에
밤10시경 도착 하자마자
안지사와 부둥켜 앉고  눈물로 통곡하든  광경
을 목격 하였다.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딱으며 울든 강금원 ...

통한(痛恨)과 의리(義理)로 가득찬 한 사나이의 눈물은 함께 있든 모든
이들을 울게 만들었고.멀리 확성기에서  울려펴지는 노짱이 부르는 상
록수(常綠樹 )가
메아리 되며, 모두의 가슴에 슬픔의 대못을 박았었다
 
지난 8/4일 오전 충북 충주시 앙성면 시그너스CC에 도착한 故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의 유해가  장지로 운구됐다. 고인은  가족들과  권양숙
여사, 안희정 C지사, 이광재  전 K지사 등  노무현 정부 인사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이 골프장 한 쪽에 뭍혔다. 한편
영결식이 열린 시그너스CC  진입로에는 봉하 마을 처름 그의  영면을
기원 하는  노란 기본이 내 걸렸다.세인(世人 )의 관심도 받지 못한채,
의리(義理)를  신조로 하며  살아져간   인간(人間) 강금원 ...

참여정부 임기 막바지에 “두고 봐라! 퇴임후 대통령옆에 누가 남아있는
지 봐요. 아마 나 말고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모두가 다
인간적 의리를 지킬 것처럼 말하지만 그런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
다” 라고 독백처럼 말한  남자중의 남자(男子)  강금원 ...

서로를 그리워했던 <바보‘ 노무현과> <상 바보‘ 강금원>이  이제  하늘
나라에서  만나 , 서로  소줏잔을  기울이고  있지  않을까  생각 해본다.
고인(故人)의  명복을  빌며 ...

노무현 대통령의  둘도 없는 벗으로  대한민국의  새로운  시대를  함께
열고 ,바다 처름 넓은 마음으로  나눔을 베풀었든 사람,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진력한 사람,  몇차례의  힘겨운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의연하게 다시 일어선 사람
( 강금원의 삶 -  묘비 일부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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