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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야신 (野神)
 제목 :  야신 (野神)
작성자 : 김영봉(57) / 2011-12-03

 

김성근  전 SK 감독 이  자신의  바통을  이어 받은  이만수 현  감독에게
직격탄을  날려 네티준 사이에는  찬반 논란 과  함께  일파  만파로 번지
고있다.
 
김성근  전 감독은  최근 남성잡지 GQ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왜 이만수 감독의 전화를 받지 않나’란  질문에
“ 내가 메일
보낸 거 보여
줄까? 교인이 왜 거짓말하냐고.교회 가서 하나님 한테
사죄하라 그랬다”
라고 말했다.
이어 “이만수가 수차례 (전화)했다고 했죠. 그런데 전화란 
것도
타이밍이  있는 거야.  지금 같으면 '감독님,  정식으로  감독 취임
했습니다' 같은 전화가 올  타이밍이야.  내가 그만뒀을때, 해임됐을 때, 
이만수  한테  구단에서  연락이  갔을 때,   그때  전화가  와야
되는 것"
이라며 "  감독님
대행  이야기가  들어왔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거  안 왔다"고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 (이  감독이 
감독대행) 기자회견  하고 그 다음 날에 시합했다.
그 때도 전화 안왔다.
세 번의   타이밍을  놓쳤다. 그게 도리 아니야?”
라며   “그것도  모르는
아이인데  그  다음에 전화 해봐야 뭐해”  라고
밝혔다.  또한  “첫 시합
끝나고 전화가 왔다.  이미  받을 타이밍도
아니라서  안  받았다. 예의
벗어난 놈  전화를  왜 받아”라고 쓴소리
를 남겼다.

그러면서  김 감독은  한국 시리즈가  끝난 뒤에도 전화가
안 왔다면서 
“내가 메일을  보내니까 전화 왔더라고.안 받았지.  
메일  문제가  아니
야.
와야  할 때  와야지. 누구를  비방하고  싶진 않지만  이만수 그 놈
은 아니니까. 바깥에서  자꾸 신경에  거슬리는
말을 하더라”  라고  덧
붙였다.
김성근 전  감독은  한국시리즈를 관람했는가란  질문에  대해
 “5차전만 봤다. 보기도  싫었고. 마지막
이겠다  싶어서 봤다. 그날  질
줄 알았다”라며 “습관이   참 무서운 게.
야구  안 보고 스포츠 신문
보니까  참 좋더라고.  볼 필요도  없고”
라고 속내를 밝히기도 하였다

지난  5년여간 김성근 감독, 이만수 수석 코치로써  SK와이번스를 이끌
어(?)온 것임에는 분명하다.2006년도 6위, 2007년 우승 (부임), 2008년
우승,
2009년 준우승,  2010년우승, 2011년도  준우승 (이만수대행) 의
성적에서 
보듯이  김성근 감독은 4 년동안 3번의 우승 1번의 준우승을
한 대단한 감독이며,  야신 (野神). 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러나 현재
김성근 감독의 폭탄발언으로 인해 떠들썩 해지고 있어,
지나간 일들을
한번 정리해서 살펴보기로한다.
그동안 김성근 감독은  이만수  감독을
말할때,동반자라고 말하던 분이,어째서  이런
발언을 하게끔 되었는지 ...

 

1. 이만수 감독 내정설.
가정하여  첫번째로  이야기를  해야 할 부분이다.그동안 김성근 감독
의 재계약에 대한 것이 미지근 해지면서 나돌았던 말 인것 같은데 ... 
또한   2006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를 하든중  SK  구단으로  부터
스카우트제의를  받을시  몇년후  감독 한다는 사전 협의설도 가정 됨
 
2. 김성근 감독 재계약 문제. 
시즌  초반에  재계약  문제를  SK가 김성근 감독에게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허나, 곧  재계약  시점을 다시 미뤘고, 올스타 브레이크 끝난
뒤로  다시한번  미뤘다 .
그리고, 올스타 브레이크가 끝난 후에는,시즌
종료후  논의하자며  또 다시  미뤘다. 프로야구 감독과 구단과의 계약
또는 재계약의  문제는 구단과  본인  당사자간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
진다.  구단은  고용자로서  이해 득실을  따져  감독을 선정하는 것
이고. 감독도 프로 직업이기에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구단과 계약
을  하려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본다.  그런데  이번 문제는.. 계약
만료  시점을  6개월에서  1년정도를  앞둔  시점에서  부터  구단이 재
계약 문제를  미지근하게  처리하고 있다는  김성근  감독의  불만에서
부터
시작됐다.
 
3. 김성근 감독 자진사퇴 발표.
김성근  감독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외골수  기질이 다분한 사람
이다. 평생을 야구판에 바쳐  살아온 사람이, 구단과 타협하지 않으며,
야구인으로써 마지막 
자존심이라  판단, 그리하여 시즌  종료후 자진
사퇴를  강행하게  된다.  구단에서는  그  다음날  바로  해임 통보 를
내리고,  이만수  2군 감독에게 SK 지휘봉을 넘겨준다. 한편으로 가정
하여  해석하는 측에서는 구단측에서  지난 5년간 함께 지내온 김성근
감독의  성향을  아주  잘 파악하고,  심기를  건드려,  자멸 하게 만든
스토리가  아닐까 한다.  쳐내긴  쳐내야 하는데,  성적은 계속 나오고,
명분이  없었으니, 이렇게  명분을  만들어 내서 ... 또한  재계약 관련
하여  사과  해야할  후배가  있다는  SK 측의  말이 심기를  건드렸다.
 
4. 이만수 감독 인터뷰.
수차례  김성근  감독님께 전화를 드렸으나 받지 않으셨다. 싱글벙글
웃으며 메이져 야구를 하겠다며, 본인의 멘트 발사.
 
5. 김성근 감독 폭탄발언.
김성근 감독이 크게 노한 이유가 .수차례 전화  했으나 받지 않으신다. -
어느  여기자가  나한테 물어왔어요.  전화 왔냐고.  안왔다고  하니까 
가서  이 감독한테  왜 안했냐고 한거에요. 그때 만수가  전화  했어요.
첫 시합끝나고.  이미  받을  타이밍도 아닌데,
예의 벗어난 놈 전화를
왜 받아. 두번정도 전화가 왔어요. 그걸로 끝이였다고. 그런데 수차례
전화 했다    .그리고...
 
일본야구를 배운 김성근감독 미국야구를 배운  이만수감독 의  스타일
은 각각 한국야구의 적용에  달리해 둘은 처음부터 서로  맞지  않았다.
또한 성격도 완전 정반대였었다.더욱이 오해를 산것은
 김성근 감독의
해임후 이만수감독
대행이 기자회견을 하는장면에서 SK팬들의 분노는
너무나도  커졌었다. 팬들이 아끼고  존경하던  감독이 구단 으로 부터
해임된날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마치 신임 감독으로 임명
된양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기도  하였다항간에는
김광수  감독대행과  비교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올해 성적부진 으로 
인한  책임감을 느끼고 감독직에서 물러난 두산 김경문 감독을 보좌해
수석코치를 맡았던  김광수코치는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며 팀을 잘
추스리겠다는  간략한 말과  함께  감독자리가 아닌  평소에 있던 자리
다른 코치들 옆에서 경기를 치렀다. 두 사람  모두  감독을 보좌하던
수석  코치 였다는걸  생각해보면  너무 나도  큰  차이일 수 밖에 없다

김성근  감독을  수장으로  임명한 
구단은 수석 코치로 이만수를 내정
한다. 그  뜻은  김성근 감독을 이어 차기 감독으로 세우겠다는 생각이
었는데  이것부터 가 불편한 동거의 시작이었다. 결국.  2010년 김성근
감독은 서로 맞지않은 이만수를  2군  감독으로 내려보낸다.
 
이유와 사정이 어찌하든  구단과 스승의  마음을 잃지  못한 이만수의
행동이 야구밖에  모르는 그를  분노케  하였나 보다. 세간(世間) 에는
김성근이
70나이에  감독할려는  욕심이 많은이라고 빈정되는 이들도
적지않다.
또한  옹고집 으로  어느 구단과도 사이가 좋지않고,기업의
오너와
월급쟁이의관계를 모르고 감독으로만 군림하려한다고도 한다 .
또  후배인 
이만수도 나이가  53살인데 아이  라는등  막말과  함부로
를 하는것은  구시대적인
행동이라는 이도 적지않고,이제는 은퇴하여
야 한다는  여론도  나오고있다.

일본의 야구감독들의 연령을보면 주니치드라곤즈(오치아이 히로미스
59세),요미우리 자이언츠(하라 다쓰노리 54세),한신타이거즈(마유미
아키노부(59세),야구르트 스왈로스(오가와 준지55세),히로시마 카프
(노무라 겐지로  46세),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오바나  디카오 55세)
세이부 라이온스(와타나베 히사노부 47세),닛폰햄  화이터스(나시다
마사타카 59세)라쿠텐 골드이글스(호시노 센이치 65세)롯데 마린스
(니시무라  노리후미 52세) 소프트뱅크 호커스(아키야마 고지 50세)
오릭스 버팔로스(오카다  아키노부 55세) 로  불과  몇년전 까지 감독
을하든 일본 프로야구의전설 왕정치 (71세), 나가시마 시게오(76세),
노무라 카츠야 77세)등 있었으나,전부 은퇴하고 50대가 주종을이루
는 세대 교체를 몇년사이 하였다. 미국 프로야구의 최고령인 감독은
플로리다의 잭메키언(81세), 최소령은 인디언스의 에렉 웨지(34세)
감독이다.  미국  감독은  나이에 상관없다고 하나 ,  역시  50 -60대
가  주종이다

김성근  감독은  제일교포  2세로 1942년 일본 교토부  태생으로 올해
70세이다. 일본명은 가네바야시 세이콘(일본어: 金林 星根 (かねばやし せいこん))이다. 교토
가쓰라고등학교(京都府立 桂 高等學校)에  재학중이던 1959년, 제4회
재일동포 학생 모국 방문 경기때 고국 땅을 밟았고 고교 졸업 후 일본
사회인 야구 팀인  교토상호  차량에서 뛰다가 1960년  재일동포 성인
구단 방문경기를 하고 나서 동아대학교(東亞大學校)에  스카우트됐다.
동아대학교를 중퇴한후 한국실업 야구에 투신,1961년  교통부에 입단
한 그는 이듬해 대한민국에 완전히 정착하고 중소기업은행 창단 멤버
되면서 1969년초까지 활동했다. 좌완 투수로 빠른  직구를 주 무기
삼아 1962년 제4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때 대표팀에  선발되어
한국
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1963년 11월 13일  대통령배 가을 리그
인천
시청과의  경기에서는 볼넷 1개만을 내주며 노히트  노런을 기록,
1964년
실업 연맹전에선 다승 공동 2위(20승5패)에 오르는등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지나친 혹사로 어깨를 다친 후  야수로 전업
했고  1969년  28세의 
이른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한다.
 
은퇴한 후 바로 마산상고의 지휘봉을 잡아 본격적으로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김성근은 중소기업은행  투수코치(1970년)및 감독 (1971년∼
1
975년), 충암고(1976년∼1979년)  신일고 (1979년∼1981년)  감독을
맡았다.1975년  제11회 아시아 선수권때 대표팀 코치로  참가해  우승
일궈 내어 체육 훈장 기린장을 받았고, 1977년 봉황기에서  충암고
를 창단
9년만에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1981년에는  신일고도
정상에 
올려 놓았다. 충암고  감독으로 있을 때부터 조범현과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된다.백넘버를 뒷 번호로 이용하는 대부분의 코칭스태프
와 달리
1977년
충암고등학교를  봉황대기 대회에서 우승으로 이끌었
을 때  이용했던
백넘버  38번을  OB 베어스 시절을 포함하여 현재도
쓰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1982년 OB 베어스의 창단 투수 코치를하였
든  김성근은
1984년 ∼ 
1988년 OB 베어스 감독을 시작으로  태평양,
삼성, 쌍방울, LG 등  무려 
5개팀 감독을 맡았다. 만년 하위권 이었던
태평양(1989년, 3위)과 쌍방울 
('96-'97,  2위-3위)을 포스트 시즌에
진출시켰으며,
2002년 침체에 빠져
있었던 LG의 사령탑을 맡아 팀을
2002년 한국 시리즈
에 올려 놓고
준우승으로 이끌었으나 구단 고위층
과의갈등을 빚으면서 석연치않게
퇴진했다.당시 LG 트윈스는 199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이른바 '신바람
야구'를  슬로건으로 내건 자율
야구를 지향하는 팀이었으나,김성근 감독이
추구하는 이른바 '데이터
야구
가 팀 컬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고 추증된다.

2006년당시 한국프로 야구감독으로 활동한 15년간 통산 866승(803패
43무, 승률 0.519)을 거둬 김응룡(백양47회) 전 삼성 라이온즈 사장의
1463승(22년간,1125패65무) 에  이언  역대2위를 기록중이다가 2011
5/4일 1,200승을   기록하기도  하였다(2,258경기  1,001패 57무 승률
0.545)또 태평양,
쌍방울, LG 등에서 하위 팀을 상위로 끌어 올리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나,한국시리즈 우승은  2007년 에서야 이루었다.
 
그의  야구인생 50년에  새겨진  어록을 보면 ...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야구가  바뀐다.
.도전하는사람에겐 시행착오가있다.시행착오가 많을수록 성공한다.
.분한 마음을 품어라 왜않되는지 왜 못하는지 억을해하고 연구하라
.세상은  주고  받는   관계지만 ,   받는것은   생각하지마라
.쑥쑥크는 나무는 곁가지가 없다 키가  크지않는  나무는  곁가지가
많다. 
 야구에만  전념하라
.인생은 내것이지 남의 것이  아니다.오늘일은  오늘  끝내라.내일로
미뤄
두면 진다.
.하루를   살드라도   목표의식을   갖고   부딪쳐라
.뒤로   미루지 말고 그날  고민은  그날   해결하라

'일구이무(一球二無)김성근 감독의 좌우명으로 '공 하나에 두가지
 생각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경기장 안에서나 밖에서나 매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고는

  프로야구선수로 살아남을 수 없어. 한순간  흐트러지면 밀리는 거야."

또한  2009년 7/17일  출간된  그의 자서전 <야신 김성근, 꼴찌를 일등
으로(자음과
모음)>가 있다.이책은 누구보다 뜨거운 야구에 대한 열정
이 담긴 삶을 다뤘다.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김감독의 다양한 에피소드
가  실렸고  야구를  떠나 인간
김성근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인식 전
한화 감독과  역도스타 장미란의
추천사도 있다.

김성근은 경질 이전까지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유일한  재일교포 출신
감독이었다. 현역
코치로 최일언(SK), 송재박(두산) 등  재일교포 출신
야구인이 있지만, 감독까지는.... 다시 말해 한국 프로야구에 재일교포
감독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뜻이다.
1982년 프로
야구는  6개
구단  체제로  출범했다. 처음 탄생한지라 당시   2개 구단
감독이
재일교포 이거나  준  재일교포였다. OB(두산의 전신)  김영덕
감독, MBC
(LG의 전신)  백인천  감독이  그 주인공이었다.  젊은 시절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에서 뛰었던 김영덕은  일본 태생의 재일
교포이다. 일본
에서 야구를 시작했고,일본야구를  통해 감독관을 정립
했다. 김영덕은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첫해 일본 야구 특유의 다양한
작전과 현란한
수비 포메이션을 바탕으로 OB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백인천은  일본 태생은 아니다.  1962년 경동고를 졸업하고
일본  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했다. 그러나 1982년 귀국
하기 전까지 20년 동안 일본
그라운드를 누비며 준재일교포로 살았다.
백인천 역시 일본 야구
스타일을 MBC에 적용해 팀을 이끌었다. 정작
백인천의  야구가  꽃을  피운 것은
1990년  LG 감독이 되었을 때이다.
그해 백인천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유행하던 기동력 야구와 뒷문을 탄
탄히 하는 불펜 야구를 도입해 LG를
창단  첫해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또한   이충남(삼성), 신용균 (쌍방울)  등도 재일교포  출신  감독으로
의 맥을
이었다. 그러나 김성근만큼  오랫동안  야구 감독을 지낸 재일
교포
야구인은 없었다. 1984년  OB를 시작으로  태평양 ·삼성· 쌍방울·
LG 감독을 
거치는 동안  계속 지휘봉을 잡았다.  하지만  한국시리즈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맡은 팀이 약팀이거나 프런트의 간섭
이 심해 ,그의 성격상  2년  이상  감독직 
을  수행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다,  2007년  SK  사령탑에 오르며  감독  취임  
첫해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거머쥐었다.지난해까지 김성근은 SK를 4년 연속
한국시리즈
로 이끌었고, 이 가운데 세 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다.
김성근도 김영덕·
백인천처럼 일본야구의 장점을
수용했다.다른 것이 있다면 단순 수용
에 그치지 않고, 일본 야구를 한국식으로 변용해  자신만의 야구
세계
창조했다는 것이다.  김성근 야구를  ‘일본 야구’로  헐뜯을 때마다
그가
“내 야구는 일본 야구가 아니다”라고 반박한 것도 이때문이었다
한국 프로
야구사에 굵직한 흔적을 남겼던 재일교포 시대는 김성근의
퇴장으로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기업의
구조조정이  그러듯이, 역사의 흐름은 이제  신세대를  요구하고있고,
기업들은 홍보 효과로 성적보다는 포먼스,입담이 좋은 탈랜트감독을
원하고있다.또한 엄격한 체계위주의 일본,한국야구에서 벗어나 자율
야구에의  전환을 예고하며.또  365 일 연습만하는 야구보다는 90년
초 시도 할려다, 시기 상조로  접은  LG  이광한감독의  자율 야구가
이제는  통하는 시대를 재촉  하기도한다,  이제 프로 야구도 이미지

와 뜻에 맞는 신세대를 지양하는 기업의 요구에 순응 하게될것 같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이  50년동안 쌓은 그 의 업적은 한국 야구계의
전설로 기록되어 영원히 간직될것이다.  쓸쓸히 퇴장하게될 김감독
을보노라면...나이든 우리의 인생(人生)도 그와 같아 섭함을 느낀다


이런 가운데 지난 11/ 1일 개성고 야구부의 노상수 (백양 64회) 신임
감독이
부임하였디. 전임 김상재(74회)감독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
한가운데 ,
총 동창회의  선발 기준에 의하여, 선출된  노상수는 우리
동기들도   잘아는 
롯데  야구의  왕년의  스타급  에이스 투수 이다.
요즘은 감독도 엣전과  달리 
공모제로 하여, 자격증, 경력등 엄격한
심사를 거쳐 , 경쟁을 하여 결정한다. 엣전의  백양 야구계 원로선배
들의  추천,  결정과   다른  방식으로  세대가  바뀌었음을  또  한번
실감케한다.신규감독의부임에따라 코치진도 바뀌었는데, 수석코치
김성현(포수출신; 49세 부산고 -  연세대 -  롯데 - 삼성)   투수코치
최태곤(33세동래고 -동아대 - 쌍방울 )이  맡았다.이들의 프로 경력
으로 볼때  노상수감독과 호흡을  맞추어  개성고  야구부를 잘 지도
할것으로 판단되며.이제고교야구도 감독이나 코칭 스탭이 프로야구
에  몸담지  않으면, 인정받지못하는 시대로 돌아섰다고 할수있겠다.


(감독 인적사항)

-성 명 : 노 상 수 (투수)

-졸업기수 : 64회

-경력 및 수상사항

(경 력)

고려대, 한일은행, 롯데자이언츠 투수 10년, 롯데자이언츠 투수코치
10년,

인제대 사회체육학과 겸임교수(야구)

(수 상)

전국중학야구 우승 : 최우수선수상

전국고교야구 우승 : 황금사자기 최우수투수상, 봉황대기, 화랑
대기 2회

봄철, 가을철 대학야구연맹전 우승 : 최우수투수상

프로야구 첫해 탈삼진왕 수상 : 141개

프로야구 첫해 최다승 : 14승

프로야구 올스타 선정 : 2회

11/21일  글쓴이는  노상수감독의  요청으로  백구회(白球會) 자격으로
개성고 야구부실을 방문, 신임 코치진 들과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1976년  중앙대회인 봉황대기 우승이후 오늘까지 35년의세월이흘러도
한번도  우승 못한  개성고 야구부는  이제 새로운 각오로  내년 우승을
위하여, 추운 날씨속에서도 훈련하는 모습에는   굳은 각오가 깊이새겨
져 있었다.내년의 개성고야구는 기대해도 좋을것같다는 생각을 해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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