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9월 7일.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 소속이던 박 의사는 중국 상하이에
머물다가 부산으로 귀국했다. 부산상고 동기로 의형제를 맺은 최천택·김영주와
더불어 동래 온천과 범어사 원효암에서 거사를 모의했다. 의열단은 강도 높은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1919년 11월 만주에서 창립된 무장단체다.
애초 박 의사는 일제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조선총독부를 폭파 대상으로
삼으려다가 계획을 수정했다. 부산지역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한국해양대 김
승(인문한국) 교수는 “일본 형사들이 18살부터 ‘구세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항일 잡지를 제작하던 박 의사가 귀국하자 끈질기게 탐문했다. 압박을 느낀 박
의사가 부산경찰서 폭발로 방향을 틀었다”고 설명했다.
9월 14일 거사일. 박 의사는 중국인으로 위장했다. 중국 고서상 행세를 하며
고서 보따리로 위장한 폭탄을 등에 지고 오후 2시30분 부산경찰서(현 중구 남포
동) 문을 두드렸다. 진기한 고서가 있다며 중국 고서 수집이 취미인 일본인 서장
하시모토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하시모토는 집무실에서 탁자를 사이에 놓고 박 의사와 마주 앉았다. 박 의사는
고서를 꺼내기 위해 보따리를 푸는 척하며 폭탄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또 일본
말로 “독립투사를 괴롭힌 죄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시모토를 꾸짖은 뒤 폭탄을
바닥에 내리쳤다. 하시모토는 파편에 맞아 피투성이가 돼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숨졌다. 박 의사도 오른쪽 다리에 중상을 입었다.
박 의사는 같은 해 11월 2일 부산지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21년 2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가 3월 31일 서울경성고법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던 박 의사는 고문과 폭탄 상처로 신음하다가
폐병을 얻었다. 박 의사는 “왜적의 손에 욕보지 않고 내 손으로 죽자”며 단식을
하다가 그해 5월 11일 옥사 순국했다.
박 의사의 폭탄 투척이 발생한 1920년 12월에는 의열단원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1921년 9월에는 의열단원 김익상이 총독부에 들어가 폭탄을 던
지고 상하이로 귀환했다. 1922년 3월에는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처단
하기 위한 거사도 실행됐다.
1921년 동아일보(5월 17일 자 3면 보도)에는 박 의사의 시신이 부산으로 옮겨진
과정이 자세하게 다뤄져 있다. “14일 오후 고관 정거장에 시체가 도착했는데,
많은 경찰이 나와 폭탄 범인의 시체까지 경계했다. 외아들 재혁을 키워서 늙어
서나마 영화를 기대했던 어머니는 기자를 붙들고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며 ‘하늘
이 무너진 것 같다’고 했다.”
박 의사는 1895년 5월 17일 부산 범일동에서 아버지 박광선과 어머니 이치수
사이에 3대 독자로 태어났다. 15세에 아버지가 별세하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삯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갔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박 의사는
1969년 4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