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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대규모 독립운동, 이 학교 이 청년들이 불지폈다
 제목 :  부산 대규모 독립운동, 이 학교 이 청년들이 불지폈다
작성자 : 동창회사무처 / 2025-08-14


부산 대규모 독립운동, 이 학교 이 청년들이 불지폈다
 
 
# 박재혁 의사 모교 개성고
- 최천택·오택 등과 항일단체 조직
- 부산경찰서에 폭탄 투척 의거도
 
# 차별에 들고 일어선 동래고
- 편파판정 일본인 심판 관사 습격
- 동래시장 일대 만세운동도 벌여
 
# 부산 첫 3·1만세 주도 동래여고
- 교사와 학생 함께 태극기 만들어
- 징역형에 반발해 ‘2차 운동까지
 
15일 광복 80주년을 맞아 부산의 고교 학생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항일 및 독립운동이 다시 조명된다. 부산을 넘어 전국적으로도 고교생이 독립운동을 주도한 곳은 개성고 동래고 동래여고 등 3곳이 대표적이다. 개성고와 동래고는 1940년 일어난 대규모 항일학생운동의 중심 학교이고, 동래여고는 1919년 부산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을 전개한 학교다.
 
 
 
노상만 개성고 역사관장이 13일 학생들의 항일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유진 기자
 
 
불꽃처럼 살다 간박재혁
 
개성고 출신의 독립운동가 중 널리 알려진 인물은 불꽃처럼 살다 간박재혁 의사다. 영화 암살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박 의사는 1895517일 부산 동구 범일동에서 태어나 부산공립상업학교(현 개성고)에 진학,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박 의사는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재학 시절 최천택 오택 등 죽마고우와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구세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일제강점기 때 금지된 대한제국 보통학교의 국사교과서인 동국역사를 비밀리에 등사해 배포하기도 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무역상으로 활동하며 중국 상해로 보폭을 넓혔고,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다. 이후 1920914일 박 의사는 중국 상인으로 위장해 당시 부산경찰서 서장 하시모토 슈헤이에게 폭탄을 투척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박 의사는 19213월 사형 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됐으며,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단식하다가 26세의 나이에 옥사했다.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전날 함께한 박재혁(왼쪽) 의사와 최천택 의사. 개성고 제공
 
 
대한민국 정부는 박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부산 동구는 2012714일 그의 생가가 있는 조방로 630m 구간을 박재혁거리로 명명했다. 개성고도 1991년 학교 안에 역사관을 설립해 학생들의 항일운동을 기린다. 개성고 출신의 독립유공자만 무려 37명에 달한다.
 
노상만 개성고 역사관장은 박 의사 외에도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친 학생들이 많다. 특히 1928618일에는 일제의 식민지도교육에 항의한 학생들이 집단으로 동맹 휴학을 하면서 전교생 500여 명 가운데 188명이 퇴학, 192명이 무기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편파 판정에 저항, 노다이 사건
 
동래고는 개성고 학생들과 함께 노다이 사건에 참여해 항일운동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노다이 사건은 19401123일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에서 열린 교련대회의 일본인 심판 노다이 겐지의 편파 판정을 계기로 발생한 학생 항일운동이다. 교련대회가 끝난 후 동래공립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와 부산공립상업학교(현 개성고) 학생 200여 명이 노다이의 관사를 습격, 돌팔매질로 기물을 파손하는 등 편파 판정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이 사건에 참여한 학생 15(동래고 9, 개성고 6)은 재판에 회부돼 징역 8월 등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가 풀려난 학생들은 학교로부터 퇴학 및 정학 등의 중징계를 받았다. 노다이 사건을 포함해 독립운동에 참가한 동래고 학생은 727, 개성고 학생은 253명에 달한다.
 
이 외에도 1919313일 동래시장 일대에서 진행된 동래고 학생들의 만세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동래구 마안산에 3·1독립운동기념탑이 건립됐다. 동래시장 입구와 동래구청까지는 만세거리로 지정돼 있다.


 
19193·1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동래여고 학생들. 동래여고 제공
 

부산 최초 3·1 만세 주도
 
부산진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는 부산지역 3·1 만세운동의 발상지다.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박차정 의사를 비롯해 부산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부산지역 만세운동은 191932일 동래여고 교사와 학생들의 주도로 시작됐다. 주경애 박시연 교사가 학생들을 결집했고, 학생들은 기숙사에 모여 이불로 창을 가린 채 태극기 100여 개를 제작했다. 태극기를 만들 천은 동래여고의 김반수 학생이 혼숫감으로 마련해 둔 옥양목 등으로 대신했다. 이어 311일 밤 9시 동래여고 학생 40여 명을 중심으로 시위를 시작, 시민까지 가담하면서 인원은 400여 명에 이르렀다. 일본 경찰은 시위 참가자 약 30명을 체포하고, 재빨리 휴교 조치를 단행했다.
 
남은 학생들은 체포된 교사와 친구들의 치욕적인 수감생활을 전해 듣고 분노해 48일 밤에 2차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주경애 박시연 교사 2명과 학생 11명이 재판에 넘겨져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 만세운동은 부산뿐만 아니라 영남지역 3·1 만세운동의 뇌관을 터뜨린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출처 : 국제신문(www.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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