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김응용(47회) ‘이 사람이다, 이 길이다’하면 끝까지 믿고 가는 ‘코끼리 뚝심’ |
작성자 : 동창회사무처 / 2020-09-07 |
▲김응용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은 코끼리라는 별명처럼 덩치가 크며, 특히 소신을 굽히지 않는 ‘뚝심’을 지녀 가장 뛰어난 스포츠 지도자로 꼽힌다. 프로야구 최다우승·최다승 사령탑… 양승호·이대진·조동찬 등 기용 ‘스타’로 키우기도 구단 사장 거쳐 협회장 맡아 야구인재 보호 규정 도입 “야구는 내 삶 자체… 비난받는 선배 되지 않을것” 김응용(79)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은 한국야구사에 길이 빛날 자취를 남겼다. 국가대표 감독으로 한국야구의 첫 세계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프로야구 사령탑으로 역대 최다우승, 최다승을 거뒀다. 그리고 프로야구 감독 출신으론 처음으로 구단 사장을 맡았고, 지금은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감독으로, 사장으로, 그리고 경기단체장으로 그는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큰 체구와 강렬한 인상처럼 그는 과감한 추진력을 발휘, 눈에 확 띄는 성과를 거뒀다. 그를 한두 마디로 정의하긴 어렵다. 김 회장은 야구를 포함한 국내 스포츠계에선 역대 최고, 최상으로 꼽히는 카리스마를 지녔다. 그의 스타일은 전형적인 야전사령관이다.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는 강한 성격, 선수단과 조직을 틀어쥐는 장악력, 한번 마음먹으면 곧바로 관철하는 결단력, 지고는 못 사는 승부근성은 그의 상징. 그런데 그 안, 보이지 않는 곳은 겉과 사뭇 다르다. 간섭을 최소화하고, 참모(코치)의 의견을 존중하며, 실수를 눈감고 어루만지는 배려를 실천한다. 겉은 무뚝뚝하고 퉁명스럽지만, 안은 여리고 순진한 사람이란 평가를 받는 이유. 그는 의지할 만한, 기댈 수 있는 언덕이다. 그래서 그의 곁엔 늘 사람이 모인다. 여러 가지 장점을 종합하면, ‘뚝심 리더십’이란 비유가 가장 어울린다. 김 회장의 별명은 코끼리. 키 185㎝, 몸무게 95㎏의 거구다. 과거엔 엄청난 덩치의 1루수였는데, 1루에서 송구를 코끼리가 과자 받아먹듯 넙죽넙죽 받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런데 그는 어릴 적부터 코끼리 못지않은 뚝심을 자랑했다. 김 회장은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 6·25전쟁 발발 후 1·4후퇴 때 어머니와 누나, 형, 여동생들을 두고 아버지와 함께 월남, 부산에 자리 잡았다. 김 회장은 1954년 부산 개성중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야구를 그만두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김 회장은 단식으로 맞서 자신의 선택을 지켰다.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강타자로 성장했다. 1966년 한일은행에 입단, 1967년 홈런왕에 올랐다. 현역 시절 ‘번트를 대지 않는 타자’로 명성을 떨쳤다. 김 회장은 우승 제조기다. 그는 프로야구 KIA의 전신인 해태 감독으로 9차례(1983·1986∼1989·1991·1993·1996·1997년), 삼성 감독으로 1차례(2002년) 등 총 10회나 한국시리즈를 제패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는 한국시리즈 4연패를 달성했다. 2910경기에서 1554승(1288패 68무)을 거뒀다. 해태는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예상과 달리 꼴찌였고, 김 회장이 구원 투입, 사령탑을 맡았다. 감독 첫해였던 1983년 신인 양승호를 4번 타순에 배치했다. 김봉연, 김준환, 김성한, 김종모 등 파워와 정확도를 겸비한 강타자들이 즐비했지만 그는 양승호를 선택했다. 반발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판단을 소신 있게 밀어붙였고 보기 좋게 1983년 우승을 차지했다. 김 회장은 과감하다. 한번 결단하면 소신을 굽히지 않고, 뚝심 있게 밀어붙인다. 선수의 장단점을 파악하는 정확한 눈, 혜안을 지녔기에 그의 판단은 늘 적중했다. 김 회장의 용병술이 빚은 작품은 양승호 외에도 여럿 있다. 이대진은 1993년 신인으로 10승 5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3.11을 거뒀다. 그런데 입단할 때는 야수, 타자 자원이었다. 이대진을 마운드에 올린 건 물론 김 회장이었고, 이대진은 2012년까지 통산 100승 74패 22세이브 2홀드, 평균자책점 3.57을 남겼다. 2001년 삼성 사령탑으로 옮긴 뒤엔 조동찬을 키웠다. 조동찬은 2002년부터 2003년까지 19경기 출전에 그친 후보 내야수였지만, 김 회장은 2004년 주전 내야수를 맡겼다. 조동찬은 그해 타율 0.222와 7홈런에 그쳤지만, 2005년엔 0.274와 16홈런으로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김 회장의 제자인 선동열 전 야구대표팀 감독은 “김 회장께선 한번 눈에 들어온 선수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끝까지 밀어준다. 선수를 믿고, 기량을 발휘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그분의 조련술”이라고 설명했다. 김 회장은 말수가 무척 적다. 말보단 행동을 우선한다. 아니 더 편하다. 그래서 추진력이 뛰어나다. 그런데 가끔은 ‘오해’를 받는다고 하소연한다. 경기 도중 더그아웃에서 의자, 배트를 집어 던져 부러뜨렸고 난로를 걷어찬 건 유명한 이야기다. 김 회장은 “걸핏하면 뭘 집어 던지는 성질 고약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의자 부순 것 한 번, 난로 걷어찬 것 한 번뿐”이라며 “그런데 그 효과가 오랫동안 지속됐다”고 말했다.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뜻. 선수단의 ‘가장’인 감독이 분을 못 참고 때려 부술 만큼 경기력이 형편없었다는 김 회장 특유의 ‘액션’이었고, 그의 이런 행동으로 선수단은 오랫동안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김 회장의 조직 장악력이 탁월하다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는 ‘간섭’을 최소화하면서도 선수단을 쥐락펴락했다. 훈련, 선수단 관리는 코치진에게 맡기고 자신은 큰 밑그림만 그렸다. 2004년 12월 삼성 사장으로 취임한 뒤엔 ‘그늘’을 자처했다. 사상 첫 경기인, 감독 출신 구단 사장으로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선수단 운영에 개입하지 않고 조력자로서 감독을 도왔다. ‘수렴청정’할 것이란 일부 우려와 달리 김 회장은 프런트 운영에만 전념했고 사상 처음이자 아직까진 마지막으로 감독, 사장(2005∼2006년)으로 정상에 올랐다. 한화 감독을 거친 뒤 그는 또 한 번 변신했다. 2016년 11월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으로 선출됐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는 대한야구협회, 대한소프트볼협회, 전국야구연합회가 통합된 단체. 그런데 내부 갈등으로 극심한 내홍을 겪었고, 2016년 3월 대한체육회의 관리단체로 지정됐다. 하지만 김 회장은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 협회를 정상화했고 2017년 1월 관리단체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했다. 그중 하나가 어린 야구 인재 보호. 김 회장은 유소년야구에 한 경기 최다 투구수(105개) 제한과 휴식일, 자동 고의4구 등을 도입했다. 특히 초등부와 중학부는 공을 60개 이상 던지면 반드시 하루를 쉬게 하고, 고교부는 31∼45개(1일), 46∼60개(2일), 61∼75개(3일), 76개 이상(4일)으로 투구 수에 따라 휴식일을 세분화했다. 물론 반발이 없지 않았다. “복잡하다” “이렇게 하면 경기와 대회를 치를 수 없다”는 불평불만이 있었지만 김 회장은 특유의 소신,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어린 시절 혹사로 인해 정작 고교를 졸업한 뒤 선수생명을 이어가지 못하는 불행한 일은 사라졌다. 김응용이란 인물을 빼고 한국 야구사를 논할 수 없다. 그만큼 그가 남긴 발자취는 크고, 많고, 뚜렷하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김 회장은 “60년 넘게 야구와 함께하고 있으니 야구는 내 삶 그 자체다. 한평생 야구를 하면서 많은 혜택을 받았기에 그걸 모두 돌려드려야 한다. 그래서 눈감는 날까지 야구를 위해 봉사할 생각이다. 특히 후배들에게 비난받는 선배는 되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출처 : 문화일보 정세영 기자 ▲장훈日야구 영웅, 김인식 前 야구대표팀 감독, 선동열 前 야구대표팀 감독, 이승엽 SBS해설위원(왼쪽부터) ■ 김응용 협회장의 인맥 나이 : 79 학력 : 성지초 ∼ 부산개성중 ∼ 부산개성고 ∼ 우석대 이력 : 1966∼1972년 한일은행 선수, 1977년 제3회 대륙간컵야구대회 대표팀 감독, 1983∼2000년 프로야구 해태 감독,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감독, 2001∼2004년 삼성 감독, 2005∼2010년 삼성 사장, 2013∼2014년 한화 감독, 2016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 김응용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은 1954년 부산개성중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김 회장은 부산개성고, 우석대를 졸업했고 1966년 한일은행에 입단했다. 현역 시절 장타력을 뽐냈으며, 은퇴한 뒤 1973년부터 1981년까지 한일은행 감독을 지냈다. 1983년 프로야구 감독으로 부임, 2002년까지 10차례 우승을 이끌었다. 장훈 日 야구 영웅 김 회장과 재일교포 2세인 일본의 야구영웅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80)은 오랫동안 우정을 쌓아왔다. 둘은 1960∼1970년대 국제무대에서 한국과 일본의 국가대표로 만나 친분을 나눴고 은퇴한 뒤에도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평소 한국야구에 각별한 관심을 쏟는 장훈은 한국을 찾아 김 회장과 술잔을 기울이는 일이 잦고, 김 회장은 사석에서 장훈과의 추억을 자주 입에 올린다. 장훈은 1959년부터 1981년까지 일본프로야구에서 2752경기에 출전해 타율 0.319, 3085안타, 504홈런, 1676타점을 남겼고 1990년에는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김인식 전 야구대표팀 감독 김 회장과 김인식(73) 전 야구대표팀 감독은 1969년부터 1972년까지 한일은행에서 선후배로 호흡을 맞췄다. 1986년 김 회장이 동국대 감독이던 김 전 감독을 수석코치로 영입, 해태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1990년 김 전 감독이 쌍방울 사령탑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둘은 1군 무대 사령탑으로 끈끈한 인연을 이어갔다. 김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김 전 감독은 누구보다 ‘김응용’을 잘 알고, 그래서 김 회장에게 강펀치를 날렸다. 김 전 감독은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당시 삼성을 이끈 김 전 회장과 맞붙어 4승 2패로 이겼다. 선동열 전 야구대표팀 감독 선동열(57) 전 야구대표팀 감독은 1985년 해태에 입단했고, 김 회장은 당시 감독이었다. 둘은 감독과 선수로 해태의 9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2001년 삼성 감독으로 부임한 김 회장은 2004년 선 전 감독을 수석코치로 기용, 지도자의 길을 열어줬다. 김 회장은 또 삼성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삼성 사령탑 자리를 선 전 감독에게 넘겼고, 둘은 2005년과 2006년 삼성의 한국시리즈 2연패를 합작했다. 김 회장은 2019년 12월 선 전 감독의 딸 결혼식 주례를 맡기도 했다. 감독과 선수, 감독과 코치, 그리고 사장과 감독으로 둘은 완벽한 하모니를 연출했다. 이승엽 SBS 해설위원 김 회장과 이승엽(44) SBS 해설위원은 삼성에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사제지간이었다. ‘국민타자’였던 이 해설위원은 김 회장에게 10번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를 안겼다. 이 해설위원은 2002년 11월 10일 LG와 한국시리즈 6차전 6-9로 뒤진 9회 1사 1, 2루에서 동점 3점 홈런을 날렸다. 이 해설위원은 6차전 4번째 타석까지 20타수 2안타로 부진했지만, 김 회장은 이 해설위원을 믿었고, 이 해설위원은 화답했다. 이어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이 터져 삼성이 정상에 올랐다. 이 해설위원은 지난해 12월 김 회장의 팔순 잔치에서 ‘제자 대표’로 황금열쇠를 전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