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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용(47회) ‘이 사람이다, 이 길이다’하면 끝까지 믿고 가는 ‘코끼리 뚝심’
 제목 :  김응용(47회) ‘이 사람이다, 이 길이다’하면 끝까지 믿고 가는 ‘코끼리 뚝심’
작성자 : 동창회사무처 / 2020-09-07

이 사람이다, 이 길이다하면 끝까지 믿고 가는 코끼리 뚝심
 

김응용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은 코끼리라는 별명처럼 덩치가 크며, 특히 소신을 굽히지 않는 뚝심을 지녀 가장 뛰어난 스포츠 지도자로 꼽힌다.
 


 
한국야구 역사이자 현역김응용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
 
프로야구 최다우승·최다승 사령탑양승호·이대진·조동찬 등 기용 스타로 키우기도
 
구단 사장 거쳐 협회장 맡아 야구인재 보호 규정 도입 야구는 내 삶 자체비난받는 선배 되지 않을것
 

김응용(79)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은 한국야구사에 길이 빛날 자취를 남겼다. 국가대표 감독으로 한국야구의 첫 세계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프로야구 사령탑으로 역대 최다우승, 최다승을 거뒀다. 그리고 프로야구 감독 출신으론 처음으로 구단 사장을 맡았고, 지금은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감독으로, 사장으로, 그리고 경기단체장으로 그는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큰 체구와 강렬한 인상처럼 그는 과감한 추진력을 발휘, 눈에 확 띄는 성과를 거뒀다. 그를 한두 마디로 정의하긴 어렵다.
 
김 회장은 야구를 포함한 국내 스포츠계에선 역대 최고, 최상으로 꼽히는 카리스마를 지녔다. 그의 스타일은 전형적인 야전사령관이다.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는 강한 성격, 선수단과 조직을 틀어쥐는 장악력, 한번 마음먹으면 곧바로 관철하는 결단력, 지고는 못 사는 승부근성은 그의 상징. 그런데 그 안, 보이지 않는 곳은 겉과 사뭇 다르다. 간섭을 최소화하고, 참모(코치)의 의견을 존중하며, 실수를 눈감고 어루만지는 배려를 실천한다. 겉은 무뚝뚝하고 퉁명스럽지만, 안은 여리고 순진한 사람이란 평가를 받는 이유. 그는 의지할 만한, 기댈 수 있는 언덕이다. 그래서 그의 곁엔 늘 사람이 모인다. 여러 가지 장점을 종합하면, ‘뚝심 리더십이란 비유가 가장 어울린다.
 
김 회장의 별명은 코끼리. 185, 몸무게 95의 거구다. 과거엔 엄청난 덩치의 1루수였는데, 1루에서 송구를 코끼리가 과자 받아먹듯 넙죽넙죽 받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런데 그는 어릴 적부터 코끼리 못지않은 뚝심을 자랑했다. 김 회장은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 6·25전쟁 발발 후 1·4후퇴 때 어머니와 누나, , 여동생들을 두고 아버지와 함께 월남, 부산에 자리 잡았다. 김 회장은 1954년 부산 개성중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야구를 그만두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김 회장은 단식으로 맞서 자신의 선택을 지켰다.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강타자로 성장했다. 1966년 한일은행에 입단, 1967년 홈런왕에 올랐다. 현역 시절 번트를 대지 않는 타자로 명성을 떨쳤다.
 
김 회장은 우승 제조기다. 그는 프로야구 KIA의 전신인 해태 감독으로 9차례(1983·19861989·1991·1993·1996·1997), 삼성 감독으로 1차례(2002) 등 총 10회나 한국시리즈를 제패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는 한국시리즈 4연패를 달성했다. 2910경기에서 1554(128868)을 거뒀다. 해태는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예상과 달리 꼴찌였고, 김 회장이 구원 투입, 사령탑을 맡았다. 감독 첫해였던 1983년 신인 양승호를 4번 타순에 배치했다. 김봉연, 김준환, 김성한, 김종모 등 파워와 정확도를 겸비한 강타자들이 즐비했지만 그는 양승호를 선택했다. 반발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판단을 소신 있게 밀어붙였고 보기 좋게 1983년 우승을 차지했다.
 
김 회장은 과감하다. 한번 결단하면 소신을 굽히지 않고, 뚝심 있게 밀어붙인다. 선수의 장단점을 파악하는 정확한 눈, 혜안을 지녔기에 그의 판단은 늘 적중했다. 김 회장의 용병술이 빚은 작품은 양승호 외에도 여럿 있다. 이대진은 1993년 신인으로 1052세이브, 평균자책점 3.11을 거뒀다. 그런데 입단할 때는 야수, 타자 자원이었다. 이대진을 마운드에 올린 건 물론 김 회장이었고, 이대진은 2012년까지 통산 1007422세이브 2홀드, 평균자책점 3.57을 남겼다. 2001년 삼성 사령탑으로 옮긴 뒤엔 조동찬을 키웠다. 조동찬은 2002년부터 2003년까지 19경기 출전에 그친 후보 내야수였지만, 김 회장은 2004년 주전 내야수를 맡겼다. 조동찬은 그해 타율 0.2227홈런에 그쳤지만, 2005년엔 0.27416홈런으로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김 회장의 제자인 선동열 전 야구대표팀 감독은 김 회장께선 한번 눈에 들어온 선수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끝까지 밀어준다. 선수를 믿고, 기량을 발휘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그분의 조련술이라고 설명했다.
 
김 회장은 말수가 무척 적다. 말보단 행동을 우선한다. 아니 더 편하다. 그래서 추진력이 뛰어나다. 그런데 가끔은 오해를 받는다고 하소연한다.
 
경기 도중 더그아웃에서 의자, 배트를 집어 던져 부러뜨렸고 난로를 걷어찬 건 유명한 이야기다. 김 회장은 걸핏하면 뭘 집어 던지는 성질 고약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의자 부순 것 한 번, 난로 걷어찬 것 한 번뿐이라며 그런데 그 효과가 오랫동안 지속됐다고 말했다.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뜻. 선수단의 가장인 감독이 분을 못 참고 때려 부술 만큼 경기력이 형편없었다는 김 회장 특유의 액션이었고, 그의 이런 행동으로 선수단은 오랫동안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김 회장의 조직 장악력이 탁월하다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는 간섭을 최소화하면서도 선수단을 쥐락펴락했다. 훈련, 선수단 관리는 코치진에게 맡기고 자신은 큰 밑그림만 그렸다. 200412월 삼성 사장으로 취임한 뒤엔 그늘을 자처했다. 사상 첫 경기인, 감독 출신 구단 사장으로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선수단 운영에 개입하지 않고 조력자로서 감독을 도왔다. ‘수렴청정할 것이란 일부 우려와 달리 김 회장은 프런트 운영에만 전념했고 사상 처음이자 아직까진 마지막으로 감독, 사장(20052006)으로 정상에 올랐다.
 
한화 감독을 거친 뒤 그는 또 한 번 변신했다. 201611월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으로 선출됐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는 대한야구협회, 대한소프트볼협회, 전국야구연합회가 통합된 단체. 그런데 내부 갈등으로 극심한 내홍을 겪었고, 20163월 대한체육회의 관리단체로 지정됐다. 하지만 김 회장은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 협회를 정상화했고 20171월 관리단체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했다. 그중 하나가 어린 야구 인재 보호. 김 회장은 유소년야구에 한 경기 최다 투구수(105) 제한과 휴식일, 자동 고의4구 등을 도입했다. 특히 초등부와 중학부는 공을 60개 이상 던지면 반드시 하루를 쉬게 하고, 고교부는 3145(1), 4660(2), 6175(3), 76개 이상(4)으로 투구 수에 따라 휴식일을 세분화했다. 물론 반발이 없지 않았다. “복잡하다” “이렇게 하면 경기와 대회를 치를 수 없다는 불평불만이 있었지만 김 회장은 특유의 소신,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어린 시절 혹사로 인해 정작 고교를 졸업한 뒤 선수생명을 이어가지 못하는 불행한 일은 사라졌다.
 
김응용이란 인물을 빼고 한국 야구사를 논할 수 없다. 그만큼 그가 남긴 발자취는 크고, 많고, 뚜렷하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김 회장은 “60년 넘게 야구와 함께하고 있으니 야구는 내 삶 그 자체다. 한평생 야구를 하면서 많은 혜택을 받았기에 그걸 모두 돌려드려야 한다. 그래서 눈감는 날까지 야구를 위해 봉사할 생각이다. 특히 후배들에게 비난받는 선배는 되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출처 : 문화일보 정세영 기자

 


 

장훈야구 영웅, 김인식 야구대표팀 감독, 선동열 야구대표팀 감독, 이승엽 SBS해설위원(왼쪽부터)
 
김응용 협회장의 인맥
 
나이 : 79
학력 : 성지초 부산개성중 부산개성고 우석대
이력 : 19661972년 한일은행 선수, 1977년 제3회 대륙간컵야구대회 대표팀 감독, 19832000년 프로야구 해태 감독,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감독, 20012004년 삼성 감독, 20052010년 삼성 사장, 20132014년 한화 감독, 2016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
 
김응용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은 1954년 부산개성중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김 회장은 부산개성고, 우석대를 졸업했고 1966년 한일은행에 입단했다. 현역 시절 장타력을 뽐냈으며, 은퇴한 뒤 1973년부터 1981년까지 한일은행 감독을 지냈다. 1983년 프로야구 감독으로 부임, 2002년까지 10차례 우승을 이끌었다.
 

장훈 야구 영웅
 
김 회장과 재일교포 2세인 일본의 야구영웅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80)은 오랫동안 우정을 쌓아왔다. 둘은 19601970년대 국제무대에서 한국과 일본의 국가대표로 만나 친분을 나눴고 은퇴한 뒤에도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평소 한국야구에 각별한 관심을 쏟는 장훈은 한국을 찾아 김 회장과 술잔을 기울이는 일이 잦고, 김 회장은 사석에서 장훈과의 추억을 자주 입에 올린다. 장훈은 1959년부터 1981년까지 일본프로야구에서 2752경기에 출전해 타율 0.319, 3085안타, 504홈런, 1676타점을 남겼고 1990년에는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김인식 전 야구대표팀 감독
 
김 회장과 김인식(73) 전 야구대표팀 감독은 1969년부터 1972년까지 한일은행에서 선후배로 호흡을 맞췄다. 1986년 김 회장이 동국대 감독이던 김 전 감독을 수석코치로 영입, 해태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1990년 김 전 감독이 쌍방울 사령탑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둘은 1군 무대 사령탑으로 끈끈한 인연을 이어갔다. 김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김 전 감독은 누구보다 김응용을 잘 알고, 그래서 김 회장에게 강펀치를 날렸다. 김 전 감독은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당시 삼성을 이끈 김 전 회장과 맞붙어 42패로 이겼다.

 
선동열 전 야구대표팀 감독
 
선동열(57) 전 야구대표팀 감독은 1985년 해태에 입단했고, 김 회장은 당시 감독이었다. 둘은 감독과 선수로 해태의 9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2001년 삼성 감독으로 부임한 김 회장은 2004년 선 전 감독을 수석코치로 기용, 지도자의 길을 열어줬다. 김 회장은 또 삼성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삼성 사령탑 자리를 선 전 감독에게 넘겼고, 둘은 2005년과 2006년 삼성의 한국시리즈 2연패를 합작했다. 김 회장은 201912월 선 전 감독의 딸 결혼식 주례를 맡기도 했다. 감독과 선수, 감독과 코치, 그리고 사장과 감독으로 둘은 완벽한 하모니를 연출했다.
 

이승엽 SBS 해설위원
 
김 회장과 이승엽(44) SBS 해설위원은 삼성에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사제지간이었다. ‘국민타자였던 이 해설위원은 김 회장에게 10번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를 안겼다. 이 해설위원은 20021110LG와 한국시리즈 6차전 6-9로 뒤진 911, 2루에서 동점 3점 홈런을 날렸다. 이 해설위원은 6차전 4번째 타석까지 20타수 2안타로 부진했지만, 김 회장은 이 해설위원을 믿었고, 이 해설위원은 화답했다. 이어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이 터져 삼성이 정상에 올랐다. 이 해설위원은 지난해 12월 김 회장의 팔순 잔치에서 제자 대표로 황금열쇠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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