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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부산경찰서 ‘폭탄의거’ 박재혁의 삶과 투쟁 -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
 제목 :  일제 부산경찰서 ‘폭탄의거’ 박재혁의 삶과 투쟁 -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
작성자 : 동창회사무국 / 2019-05-31



일제 부산경찰서 ‘폭탄의거’ 박재혁의 삶과 투쟁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


김삼웅 지음/호밀밭/1만8000원




- 독립운동사 연구가이자

- 유명 평전 저술가인 저자

- 당시 벼랑 끝 의열투쟁에

- 시대적 필연성을 부여해

- 입체적인 박재혁 전기 출간


평전(評傳)이 평면적이어선 안 된다. 반드시 ‘입체적’이어야 한다. 저명한 독립

운동사 연구가이자 친일반민족사 전문가이며 평전 저술가인 김삼웅 전 독립기

념관장이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을 썼다. 박재혁 의사의 삶과 투쟁을 ‘총체적으

로’ 이해하고 느끼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이 평전은 탁월하다.


이 책은 부산이 낳은 독립운동투사 박재혁(1895~1921) 의사가 살았던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우선 잘 보여준다. 김삼웅 저자가 한국의 독립운동사 자체를

오랜 세월 깊이 연구한 권위자이다 보니 정확히 맥을 짚어준다. 그런 바탕 위에

서 평전의 주인공인 박재혁 의사의 삶과 투쟁을 서술한다. 그러니 박재혁 의사

가 어떤 시대에 살았기에 그와 같은 삶을 살았고, 왜 그와 같은 결단을 내렸으

며, 그런 실천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드러난다. 입체적이란 얘기다. 인물이나

시대,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다.


이 사진은 박재혁 의사가 의거(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하루 전인

1920년 9월 13일 동지 최천택과 함께 찍은 것으로 박재혁 의사의 유족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호밀밭 제공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박재혁 의사는 ‘일제의 압제를 참지 못하고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독립투사’라는 비교적 평면적인 이미지를 조금씩 벗는다.

“박재혁은 1895년 5월 17일 부산 범일동 183번지에서 아버지 밀양 박씨 희선과

어머니 경주 이씨 치수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37쪽) 박재혁은 올곧

은 사람이었다. 그는 1912년 부산공립상업학교(현재 개성고)에 진학한다. 고교

시절 그는 벌써 일제의 감시와 방해를 뚫고, 일제가 금지한 한국 역사책(‘동국역

사’)을 비밀리에 등사기로 찍어 부산시내 학생들에게 보급하고, 구세단이라는

조직까지 만들어 독립을 염원했다. 올곧은 심성의 열혈 청년이었다.


고교 졸업 뒤 취업한 그는 직장 생활을 하다 중국 상하이, 싱가포르, 홍콩을 오

가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안목을 키운다. 독립지사 최천택 등과 함께 ‘밀양 사

람’ 김원봉(1898~1958) 등을 필연적으로 만나 의열 투쟁에 몸담는다. 의열 투쟁

은 국가적·집단적 저항 수단이 막혔을 때 극소수 인원이 적의 요인이나 중요 요

소를 직접 타격하는 방식이다. 거의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당시 독립운동 진영이 위험하기 짝이 없고 어려운 의열 투쟁을 택한 데는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역사적 이유와 배경을 설명해주지 않으면, 박

재혁 의사가 1920년 9월 14일 ‘적의 심장부’인 부산경찰서 서장실까지 담대하게

들어가 하시모토 서장을 처단하고자 폭탄을 터뜨린 뒤, 불과 27살에 감옥에서

단식투쟁하다 순국한 전모를 이해하기란 어렵다. 게다가 박재혁 의사의 의거는

의열단의 의열 투쟁 가운데 첫 성공 사례였다. 이 책은 그런 맥락을 잡아준다.

     
 
호밀밭출판사 측은 “이번 평전에는 거사 전날인 9월 13일 동지인 최천택 등과

함께 친구 김영주의 집에서 잤다는 증언을 새롭게 확보해 수록했다”며 “그리고

지난해까지 5월 12일 열던 박재혁 의사 추모제는 올해부터 실제 돌아가신 날짜

인 5월 11일에 지내게 됐다”고 설명했다. 조봉권 문화전문기자


국제신문 5/31일 본지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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