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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미래로 100년] 1. 위대한 선열 부끄러운 후손
 제목 :  [3·1운동 100년, 미래로 100년] 1. 위대한 선열 부끄러운 후손
작성자 : 동창회사무국 / 2019-01-02


   

[3·1운동 100년, 미래로 100년] 1. 위대한 선열 부끄러운 후손



1919년 3월 13일 부산 동래 망미루 일원에서 열린 동래고등보통학교(동래고 전신) 만세운동(왼쪽)과 1940년 11월 23일 구덕운동장에서의 부산항일학생의거를 각각 재현한 고증도. 불행하게도 부산에서 벌어진 항일의거를 대표하는 이 두 쾌거를 기록한 사진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동래고 역사관에 보관 중인 그림을 촬영했다. 이상길 향토자료수집가 제공

1919313일 부산 동래 망미루 일원에서 열린 동래고등보통학교(동래고 전신) 만세운동(왼쪽)19401123일 구덕운동장에서의 부산항일학생의거를 각각 재현한 고증도. 불행하게도 부산에서 벌어진 항일의거를 대표하는 이 두 쾌거를 기록한 사진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동래고 역사관에 보관 중인 그림을 촬영했다. 이상길 향토자료수집가 제공


역사는 기억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잊힌다. 시간이 갈수록 더 그렇다. 1919

1운동 후 100. 침략의 거점이었던 탓에 누구보다 악랄하게 핍박받았던 부산

지역의 항일운동은 그 노력과 희생에 비하면 '기억상실' 수준이다.

 

1940년 부산항일학생의거 

주동자 15명 중 서훈 8명뿐 

공적 오롯이 자신이 '입증' 

국가 하는 일 사실상 없어 

신규 유공자 매년 감소세  

수형·옥고 위주 선정 기준  

"보훈처가 적극 발굴해야 


서훈 준비는 박사과정  


독립유공자 공을 인정받아 서훈을 받기란 쉽지 않다. 특히 자료가 소실될 경우

서훈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 하지만 이를 돕기 위해 국가가 하는 일은

사실상 없다.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기의 공적을 입증해야

한다. 역사적 지식이 부족한 후손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자료를 찾아내 독립 활

동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전문적인 지식을 토대로 오랜 시간 연구가 필요한 작

업이기 때문이다.

  

서면 목원치과 이명호(66) 원장은 부산항일학생의거 사건으로 집행유예 3년을

받고 3개월간 옥고를 치른 이인희 씨의 아들이다.


19401123일에 일어났던 부산항일학생의거는 1929년 광주학생의거와 더

불어 일제강점기에 전개된 가장 큰 규모의 학생 항일 운동이다. 이 의거는 동래

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와 부산제2공립상업학교(현 개성고)의 학생 1021명이

참가했다. 국가기록원의 학적부를 살펴본 결과 일제 경찰은 200여 명의 학생을

체포했으며, 퇴학 등 학교 내부 징계를 받은 학생은 총 83명이나 될 정도로 규모

가 컸다.  


당시 사건 주동자로 지목돼 구속당한 학생은 15명이다. 하지만 이 중 독립유공

자로 인정받아 정부 서훈을 받은 이는 8명뿐. 나머지인 7명은 함께 고초를 치렀

음에도 독립 유공자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인희 씨는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한 7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이 원장은 아버지

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2012년에 아버지를 독립유공자로 등재해 달라고 보훈청

에 요청했지만 '일제 말기의 행적 불분명'이라는 이유로 보류됐다. 지난 12월에

광복회 부산지부의 도움을 받아 재신청을 한 뒤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이 원장

"옥고 기록까지 있어도 서훈이 어려운데 이마저도 없는 많은 독립운동가는

서훈을 받기가 훨씬 어려울 것"이라며 "개인이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은 사실상

너무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로 유족임이 확인된 이인희 씨의 경우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광복회 부산

지부는 2013년부터 부산학생항일의거로 구형을 선고받았으나 서훈받지 못한

이들의 유족을 찾고 있지만 나타나지 않고 있다. 유족이 직접 신청하지 않으면

독립유공자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탓에 이인희 씨를 제외하고

는 독립유공자 등재 신청조차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개인적으로 이를 돕는 움직임이 전부다. 광복회 회원 이상

(58) 씨는 일제강점기 말에 일제 군수 공장이었던 조선방직을 폭파하려 했던

독립투사 이광우(2007년 작고)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를 독립유공자로 등재

하기 위해 공부했던 경험을 토대로 독립운동과 관련된 연구를 이어오고 있다.

2012년부터는 부산항일학생의거를 중심으로 자료를 연구 중이다.

   

처음 부산항일학생의거 관련 조사를 진행했을 당시 다른 항일 운동보다 비교적

근대에 있었던 일임에도 재판기록이 소실되어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지

금까지 전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이씨는 오랜 발굴 작업 끝에 당시 매일신보등 언론 보도와 학적부 등

새로운 기록을 찾아냈다. 이를 토대로 최근에는 경성대에서 한국학 박사 학위

까지 준비하고 있다. 이 씨는 "박사 학위를 준비할 수 있을 정도로 연구해야 독

립 활동을 증명할만한 자료를 찾을 수 있으니 일반인들은 꿈도 못 꿀 것"이라고

말했다


 

보훈청이 적극적으로 '발굴서훈'해야 

 

2015년에 520명이 서훈된 이후 신규 독립유공자 서훈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

고 있다. 2016313, 2017년에는 270명에 그쳤다.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 위

해서는 옥고 사실이나 독립 활동을 증명할 자료가 필요한데, 개인이 이를 찾기

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어 새로운 사료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그 수

는 늘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보훈청 관계자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받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재판문

이나 수형 기록이 중요한 입증 자료기 때문에 끝까지 숨어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은 오히려 서훈을 받지 못하는 일도 있다""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 중에는

실명을 쓰지 않은 사람도 많아 자신이 독립유공자의 유족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유족의 독립유공자 신청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보훈

청이 적극적으로 발굴서훈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2014년부터 적용된 '3차 국가보훈발전 기본계획'에 따르면 독립유공자로 인

정받기 위해서는 수형 3개월 이상 또는 독립운동활동을 6개월 이상 했다는 것

이 자료로 입증되어야 한다. 경성대 사학과 강대민 교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개

인이 입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유족이 직접 신청하지 않더라도 기록이

있다면 보훈청이 적극적으로 서훈하는 선제적인 발굴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

.

 

   

부산일보 장병진·이상배 기자 joyfu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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