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민족명문학교 개성고총동창회입니다.

백양뉴스

자명 김지태 선생, 그는 누구인가 ?
 제목 :  자명 김지태 선생, 그는 누구인가 ?
작성자 : 동창회사무국 / 2012-10-25

최근 정수장학회 관련 정치권에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를 떠나 김지태 선생에 대한 곡해와 오도가 지나쳐 우리 동문들이라도 김지태 선생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2004년 발족한 김지태선생기념사업회의 자료를 일부 발췌하여 올립니다.

김지태 선생께서는 우리 동창회 4대 회장으로써 25년간 봉사하며 모교와 동창회에 지대한 업적을 남기신 분입니다. 젊은 후배들은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자명 김지태 선생, 그는 누구인가 ?

우리나라 현대사에는 2명의 출중한 기업인을 가지고 있다.

한분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교육사업의 선구자이신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

그분은 1964년 유한학원의 설립에서 임종 시까지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의 철학을 몸소 실천한 기업가로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함으로서 세월이 갈수록 더욱 존경을 받는 그는 모든 기업인의 사표가 되었다.

또 한분은 장학사업의 선구자이신 자명 김지태 선생!

1958년 당시 대한민국 최대의 장학사업단체인 부일장학회를 창립하여 오늘날 정수장학회로 이어져오고 있으며, 그간 무려 4만여명의 장학생을 배출하였다. 또한 1961년 별도의 ‘김지태장학금’으로 약 20년간 모교인 부산상고(현 개성고)에 장학금을 지원하였을 뿐 아니라, 해방 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여러 많은 사회사업을 위해 막대한 사재를 털어 지원한 향토기업인이었다. 선생 역시 '기업은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기업철학을 누구 못지않게 실천한 대한민국의 손꼽히는 사회사업가였다.

그런데 왜? 김지태 선생의 그 많은 업적이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점차 잊혀져만 가는 것일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뜻을 모아 더 늦기 전에 역사의 교과서 앞에 다시 세우기로 하였다.

김지태 선생은 일제강점기시절부터 민족자본으로 기업을 크게 일으킨 향토기업인으로서 이승만,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정경유착을 거절한 대표적인 기업인이었다.

1930년대 청년시절, 시작한지 1년 여 만에 실패한 첫 사업이후 조선지기 주식회사를 시작으로 하여 무역업, 부동산업, 조선주철공업 합자회사로 이어지며 크게 성공한다. 시대의 트랜드를 정확하게 읽는 탁월한 예지력과 두터운 신망과 인맥을 바탕으로 선생은 특히 일본인을 상대로 하여 막대한 민족자본을 축적시킬 수 있었다. 해방 후에는 적산기업으로 경영난에봉착한 아사히견직회사 직원자치위의 간곡한 부탁을 물리치지 못하고 관리인으로 취임하였는데, 최우선으로 정상임금, 특근수당, 후생시설 확충 등 노동환경을 개선시키며 근로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등 탁월한 경영으로 회사를 정상화 및 크게 성장시켰다. 또한, 이승만정권의 정치자금 거절 대가로 정치보복을 받은 조선견직 탈세사건에서는 국세청 직원들도 감탄할 정도의 세무회계가 완벽하여 타 기업의 모범이 되는 등 정도경영의 표상이 되었다. 이후 한국생사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전국적으로 양잠농가의 수익에 기여하며 세계 2위 생사생산업체로 발돋움하는 등 해외수출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삼화그룹의 회장으로 50년간 왕성한 기업활동을 하며 정경유착을 거부한 대표적인 기업인이었다.

" 5.16 격변 속 삼화 지고 삼성 뜨고 " <일요신문 2004년 8월 15일자 기사>

이 대통령에 이어 김 회장을 회유하고자 나선 이는 이기붕 씨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기붕은 김 회장에게 모직 공장을 미끼로 내놓았다. 하지만 김 회장은 이승만 정권의 정치자금 제의를 단호히 거절했고, 그 보복으로 모직공장은 그 뒤 삼성의 이병철에게 돌아갔다. 삼성그룹의 오늘을 가늠하게 한 제일모직이 바로 그것이라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이승만 정권과 5.16 군사쿠데타 격변의 시대를 거치면서 당대의 두 재벌 중 한 사람은 몰락하고, 한 사람은 국내 최고의 사업가로 성장했던 셈이다.

자명선생은 한국mbc 설립 등 민간방송의 개척자이며 정론직필의 언론사 사장으로서 마산 3.15 의거의 현장방송과 보도는 4.19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48년 2월 창간 이래 기자의 생활고와 파업 등으로 최악의 경영난을 겪던 부산일보를 49년 7월에 인수하여 2대 사장으로 취임한 선생은 사재를 털어 가장 먼저 직원들의 근로후생복지를 수준급으로 올리고 타 언론 및 대학의 진보인사를 발탁하여 기사의 양과 질을 동시에 올리는 등 정도언론을 위한 경영개선을 획기적으로 강구하여 오늘날 부산일보의 기반을 단단히 다졌다.

'부산일보의 주요 골격들은 이 당시에 기초가 다져진 것' <부산일보 50년사>

부산일보가 지금도 명성을 자랑하는<동남풍>과 <중앙동> 그리고 <부일살롱> 등 고정란은 모두가 이 때 신설된 것들이다. 말하자면 부산일보 지면상의 주요 골격들은 이미 이 당시에 기초가 다져진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당시 부산일보는 국민의 눈이 되고, 부산문화방송은 국민의 귀가 되어

또한 49년 개국하여 5개월 만에 경영난에 봉착한 한국 민간방송의 효시인 부산문화방송을 인수하여 당시 일본방송에 의존하던 국민의 귀를 자국의 방송으로 돌려놓을 뿐 아니라, 어려운 시절 국민들에게 커다란 자부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부산일보는 당시 자유당정권의 하수인이 상주하며 제작감시와 간섭에도 불구하고 60년 3월 15일 이승만 독재의 부정선거 실태를 국민의 눈이 되어 적나라하게 보도하였고, 부산문화방송은 국민의 귀가 되어 마산사태의 현장중계를 생생하게 전달하였다.부산일보는 그로 인해 기자들이 테러를 당하기도 하였지만 15회에 걸쳐 계속 연재하는 모험을 강행하였다. 특히 동년 4월 12일 마산사태의 희생자 김주열 군 사체 사진을 처음으로 입수하여 신문 게재 시 돌아올 엄청난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사장인 선생의 무한 책임 하에 대문짝만하게 실어 보도함으로서 4.19 민주화운동을 점화한 민주언론의 영웅들이 되었다.

' 당시 외국 방송관계자들이 혀를 내두르며 놀란 ' <부산일보 50년사>

60년 3월 15일 정, 부통령 선거일을 앞두고 김지태 사장은 방송 마이크를 부산일보사 5층 사장실로 옮기게 했다. 부산일보 마산지사에서 전화로 송고해 오는 현지뉴스를 현장녹음과 함께 임시뉴스로 내보내게 된 생생한 보도는 4.19혁명을 성공으로 이끄는 기폭제의 역할을 충분히 담당했던 것이다. 탄생한 지 불과 몇 년 밖에 되지 않는 햇병아리 방송이 이런 엄청난 일을 해내었으니 당시 외국 방송관계자들이 혀를 내두르며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 세기적인 특종… 4.19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 ' <부산일보 50년사>

60년 4월 12일자 부산일보 3면에 3단크기로 게재된 한 장의 사진이다.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군이 마산 앞 바다에 시체로 발견돼 떠오른 것을 마산지사 허종기자가 촬영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당시로서는 대담하다 할 정도의 크기로 확대보도한 세기적인 특종 사진으로 이 사진이야말로 바로 4.19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음을 누구나가 인정하는바 그대로다.

- 부산MBC 비화특집 그리고 한국민영방송의 재평가 - <월간조선 1998년 12월호>

부산MBC는 3.15, 4.29, 이박사 하야까지 갖은 협박에도 굴하지 않은 공정한 보도와 프로그램으로, 편파보도로 일관되고 때로는 식상하기까지 했던 국영방송을 압도하기 시작했으며, 부산MBC의 출현은 일 년만에 방송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중략) 1960년 3.15, 4.19, 4.26 등 암울했던 시대와 함께 걸어온 방송의 역사는 40여 년만에 이제 부산문화방송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61년에는 서울에 한국문화방송을 발족하여 오늘날 민간방송의 선두주자로 발돋움하는데 선구자적인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 언론계에 거대한 청사진을 그리며 흑백TV방송도 준비해오던 선생은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던 이 모든 것을 62년 5.16장학재단에 시대적인 이유로 넘겨야 하는 크나큰 상처를 받았고, 그로부터 영면하실 때까지 20여 년간 두고두고 그 아픔이 사라지지 않았다.

김지태 선생은 이승만 대통령의 여당 횡포를 견제한 민우회의 주축이었으며, 사사오입 개헌 파동에 양심파 의원 8명과 함께 반대표를 던진 정치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가 만횡하던 시절 무소속 국회의원들과 함께 민우회를 발족하여 여당의 횡포를 견제하였으며, 그 대가로 자사의 기업이 조방낙면 사건, 조선견직 탈세사건 등 정치적 보복을 받기도 하였고, 여당의 거액 정치자금 기여 대가로 중석불 특혜제안 등의 엄청난 유혹들을 단호히 거절하는 등 국회의원으로서의 자세에 하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정부의 계엄법 선포 등으로 인한 국회탄압과 미래가 암울한 안개정국의 시기에는 부득불 자유당에 입당하는 등 수모를 겪었으나 사사오입 개헌 파동에 양심파 의원 8명과 함께 반대표를 던지므로 인해 자유당에서 제명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선생은 46년과 53년 2회에 걸쳐 막대한 사재를 부어 부산특별시 승격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5표의 차이로 애석하게 실패하였다. 결국 첫 시도로 부터 18년 가까이 흐른 63년에야 비로소 부산직할시로 출범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김지태 선생은 해방 후 혼란기시절부터 시작한 사회사업가의 선구자로서 부일장학회, 부산갱생회, 승리공사 설립 등 다방면에서 시민과 사회에 봉사하였다.

27년 20대 초반의 회사원 시절 ‘부산진 정묘야학교’를 개설하여 폐결핵으로 그만두기까지 5년간 불우한 아이들에게 봉사하였으며, 57년에는 영주동에 있던 수천 평의 토지를 기본재산으로 부산갱생회를 설립하여 수백 명의 불우한 사람에게 보금자리 및 재활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특히 58년 11월 부산시내 10만평의 토지와 3천만환의 현금으로 설립한 부일장학회는 62년 7월 5.16장학회로 넘겨지기까지 무려 1만2천여 명의 학생에게 1억7천여만환의 장학금을 지급하였는데 당시는 상상도 못할 초대형 장학재단이었다. 그리고 장학재산을 본인이 전액 사재출연 함에도 명칭을 '부일장학회' 라 하여 선생의 아호나 이름을 전적으로 배제한 사실은 매우 존경받을 만한 일이었다.

' 나라의 백년대계는 훌륭한 인재를 많이 양성하는 것 ' <나의 이력서 -김지태->

나라의 부강을 이룩하려면 훌륭한 인재가 많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앞서야 하는데 우수한 자질을 가진 학생들이 가난 때문에 그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잃는다면 곧 그것은 나라의 큰 손실이라 향토의 인재를 발굴해서 향토의 발전과 조국의 앞날에 기여할 수 있도록 뒷받침 해야겠다는 것이 부일장학회 창설의 나의 뜻이었다.

그리고 61년 모교인 부산상고에도(현 개성고) 별도의 ‘김지태장학금’을 설립, 약 20년간 수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이런 업적을 두고 그를 세간에서 '장학사업의 선구자' 라 일컬음에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 외에도 6.25 동란으로 인해 임시수도가 부산으로 옮겨온 시절 국군의 후생시설을 지원하기 위해 4억환의 자금을 마련하여 승리공사를 설립하였는데 그 중 1억환을 쾌척하였을 뿐 아니라 항구적인 국군수용을 위해 수만 평의 대지를 자진 헌납하기도 하였다.

김지태 선생은 문화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선생께서 사장과 회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의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은 부일영화상, 안익태 선생 초청 연주회 개최 등……

우리나라에 TV가 보급되기 전인 영화전성시대에 우리나라 영화상의 효시인 부일영화상을 제정하여 영화산업발전에 기여하였다.58년 3월부터 시작되어 73년 제16회로 끝나기까지 영화제작자, 배우, 그리고 영화팬들에게 숱한 화제를 꽃피우게 하였다. 1962년 4월 7~8일에는 부산일보 주최로 <안익태초빙지휘 교향악연주회>를 부산서중학교 강당에서 개최하였다.

당시 부산에는 시립교향악단이 발족하기 전이었고, 시민회관과 같은 무대가 생기기 전이었다. 스페인 마츨카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이자 한국국립교향악단 지휘자인 안익태가 지휘한 연주회에는 관객이 맨바닥에 앉아서 들었다. 더욱이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 선생은 관중을 기립시켜 애국가의 합창을 요구했고 베토벤의 운명교향곡 연주중에 이를 중단시키고 틀린 연주를 지적, 다시 연주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메조소프라노 이은숙, 바리톤 김석준의 합창을 곁들인 이 연주회 입장료는 일반 500환, 학생단체 200환 이었다.(부산일보 50년사에서 발췌)

1959년에는 부산문화방송의 주최로 윤이상선생의 <세계현대음악제 입선 축전> 행사를 개최하였는데 당시 윤이상 선생의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이 독일의 다름슈타트에서 입상하여 세계 음악인들의 비상한 관심이 쏠리던 시기였다. 당시 음악PD였던 최광민씨의 기획으로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씨를 통해 그 수상 작품의 테이프를 입수하여 부산의 기관장과 문화계 인사 등 약 250명을 초청해서 축하행사를 가졌다. (부산문화방송 사우회 10년에서 발췌 요약)

이상으로 살펴본 바 자명선생의 업적은 우리 현대사 전반에 걸쳐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이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군사독재 정권이 장기 집권한 까닭이다. 언론 사업을 송두리째 넘긴 후 자명선생은 돌아가실때까지 군사정권으로부터 철저히 말과 행동을 억제당했다.

이제 반칙과 왜곡으로 점철된 현대사의 질곡으로부터 자명선생을 세상에 다시 재조명하고자 한다.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유일한 박사와 자명 김지태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은 제2, 제3의 존경받는 기업인들이 많이 배출되어 이 사회를 밝히게 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의를 행함에 주저하는 자는 참된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 김지태 선생 - <나의 이력서>

[ 참고문헌 ]

1. 부산일보 50년사 (1946~1996) - 부산일보사 -

2. 나의 이력서 (1976년 5월) 김지태 저 - 한국능율협회 -

3. 부산문화방송 사우회 10년 (2002년 11월) - 부산문화방송 사우회 -

4. 자명 김지태 평전 ‘문항라 저고리는 비에 젖지 않았다’ -자명김지태전기간행위원회 편-


이전글 다음글 리스트 답글
TOP